▲특정인이 점심 메뉴를 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좀 덜어주기 위해 갖은 방법을 총동원했지만 모두를 만족하는 절묘한 조합은 없었다. 사진은 지금까지 우리의 입을 즐겁게 만들어준 식당들의 간판들.
김학용
어느 시간보다 정확한 배꼽시계, 오전 11시가 넘어가자 '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이 반짝거린다. 아…,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나 보다. 오늘은 왠지 시원한 냉면이 당기지만, 그래도 항상 '밥을 먹어야 힘을 낸다'는 어머니의 말을 생각하니 그러지도 못하겠다.
1분 1초라도 알뜰히 쓰기 위해 미리부터 마음의 준비를 시작해보지만, 막상 점심시간이 되어도 결정을 못 내렸다. 어쨌거나 조직 내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어느새 사라지고 점심 고르는 걸로 똘똘뭉친 팀원들. 하지만 막내 신입부터 밤새 달려 속 쓰린 이사님까지 어느 장단에 맞추어 메뉴를 골라야 하는 걸까?
"오늘은 뭘 먹으러 갈까요?" "아무거나!"그렇지 않아도 요즘 업무 스트레스로 이만저만이 아닌데 점심 메뉴선정 스트레스까지 겹치니 여기 '멘붕' 하나 추가요. 박 과장의 질문에 무심코 "아무거나!"를 외쳤던 이 불편한 상황, 지금 생각하니 조금 미안하다. 그러고 나서는 특정 메뉴를 권유하면 "또 거기야?"라고 거부했던 이 불편한 상황들…. 점심시간마다 매일 고비를 맞이하는 건, 팀원들의 혈액형이 모두 O형과 B형으로 이루어진 게 원인일까?
탁월한 '젊은 감각'으로 점심메뉴 고르라고 한다면?오늘 점심 메뉴를 고를 결정권은 다행히 막내에게 주어졌다.
'음…. 오늘은 아저씨(?)들이 자주 가는 김치찌개로 치우칠 가능성이 높단 말이야. 내가 아침에 현미밥에 김치찌개랑 계란프라이 잔뜩 먹고 왔으니까, 그러려면 잽싸게 메뉴를 먼저 선수쳐야 할 텐데… 어쩌지?'사실 막내는 '튀김우동 컵라면+김밥천국 참치김밥'의 절묘한 조합을 가장 선호하지만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팀원들 앞에서면 항상 작아지는 막내, 역시 '아니 아니, 아니 되오!'다.
일단 막내는 최대한 상냥한 표정으로 "김치찌개는 자주 먹었으니까 오늘은 길 건너 라면사리까지 서비스해주는 얼큰한 부대찌개집 어때요?"라고 제안하니 팀원들은 "부대찌개 요즘 방송에서 말 많던데? 다른 걸로 선정해 봐, 젊은 감각으로 말이야~"라며 항변한다. 메뉴 정하는데 젊은 감각이 다 무슨 소용인지, 참 난감하다.
이어 눈치를 살피며 "그럼 설렁탕이나 갈비탕을 먹을까요?"라고 했지만 역시 "그거, 여직원들이 싫어하는데…"라며 동료들이 말끝을 흐린다. 다시 용기를 낸 막내,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메뉴를 준비하라면? 기다려! 천국(?)에서 엄마 몰래 김밥과 함께 먹는 라면!"개콘의 신보라처럼 용감하게 랩으로 애교도 부려보지만 역시 무용지물이다. 멤버들은 여전히 "이건 아니다"며 손사래를 친다.
결국 어제 먹었던 음식을 또 먹자니 그렇고, 뭐 딱히 먹을 것도 없던 찰라, "이런 우중충한 날씨에는 짬뽕 국물이 당기지 않아?"라며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결국 중화요리 집으로 결정났다.
자장면, 짬뽕, 볶음밥 모두 주옥같은 메뉴... 뭘 먹지?하지만 중화요리집으로 결정난 것이 모두 끝이 아니었다. 메뉴 정하는 데에만 또 몇 분이 흘러간다. 여기서도 "뭐로 드실래요?"라는 질문에 또 망설여진다. 결국 또 다시 "아무거나"라고 답하고 말았다. 도대체 자장면인가, 짬뽕인가? 자장면을 선택했는데 막상 음식이 나오니 이 대리의 우동이 더 맛있어 보인다면? 게다가 오늘따라 짬뽕이 맛있다며 후루룩거리기라도 하면 '잘못한 선택'에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자장면과 짬뽕, 볶음밥과 잡채밥 모두 주옥같은 메뉴들 아니겠는가. 팀원들은 또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섰다. 오죽하면 '아무거나'와 '짬짜면'이라는 메뉴가 나왔을까.
처음엔 그래도 사정이 나았다, 괜찮은 횟집 식당 하나를 뚫으니 점심 메뉴가 매일 바뀌는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월요일은 매운탕, 화요일은 회덮밥, 수요일은 새우돌솥밥… 매일 매일 점심시간만 되면 고민하게 되는 메뉴 선택에서 해방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것도 '육해공'중에서 선택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사라질 수 있다는 점, 특히 제육볶음에 상추쌈을 원하는 특정직원(?)의 항의로 어쩔 수 없이 세 달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다양한 배달 서비스 이용도 해봤다. 점심 때 반찬만 배달해주는 전문점을 이용해보니 반찬도 매일 다양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 먹으니 가격도 절약할 수 있었다. 배달 서비스라 굳이 밖으로 안 나가도 되고 시간도 절약해서 좋았다.
특히 요즘은 배달메뉴도 다양한 메뉴들이 생겨 고민을 덜어주기도 했다. 한 가지 메뉴에 두 가지 요리의 맛을 볼 수 있는 실속메뉴로 알찬 점심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가끔은 기분전환 삼아 도시락을 주문하면 회사 앞 벤치에 소풍 온 것처럼 먹는 것으로 어느 정도 기분전환도 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것도 밥상 차리는 것을 서로 미루다 보니 결국 점심시간이 다가와도 여전히 미적거린다. 다들 제 일이 바쁜 처지라 서로 눈치만 살피다 보니, 어느새 '미루기+눈치보기+부려먹기'가 생활화 되어 버렸다.
이후 특정인이 메뉴를 정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좀 덜어주기 위해 갖은 방법을 총동원했다. 순두부, 낙지덮밥, 주꾸미볶음, 부대찌개, 된짱찌개, 김밥+라면, 백반, 짜장면, 칼국수, 생선조림, 생선구이, 불고기뚝배기, 칼국수, 제육볶음 등 특정메뉴는 물론 양식, 한식, 중식, 일식, 패스트푸드 등 원하는 모든 장르까지…. 일단 메뉴를 모두 나열한 후 오로지 '신의 뜻'에 맡기는 사다리타기, 제비뽑기 등 모험을 건 랜덤 방법까지 동원했다.
점심메뉴 오로지 '신의 뜻'?... 아니 아니, 아니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