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윤성효
내가 태어난 날은 1965년 4월 1일 만우절입니다. 생일날 축하주 한 잔 마시자고 하면 친구들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릴 적 나의 별명은 '땡철이'였습니다. 아버지가 가르쳐 준 노래 <학교종>을 저는 밤낮으로 "학교종이 땡땡땡" 하며 노래했습니다. 그렇게 생긴 별명 '땡철이'는 스무살이 넘도록 저의 애칭이었습니다.
6월항쟁을 거치며 사람들은 나를 '시대를 일깨우며 온몸으로 종을 치는 종치기'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인생을 돌이켜볼 때 첫 번째 중요한 해는 1979년입니다.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한 시민들의 부마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그 시대엔 군인들이 세상을 통치했습니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습니다.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시위대를 만났습니다. 시민들은 거리를 점령하고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습니다.
"유신 철폐! 독재 타도!"난 중학생이었지만 대학에 다니는 형이 가져온 책을 읽으며 나름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허겁지겁 옷을 갈아입고 나섰습니다. 이날 단짝인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밤 늦게까지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따라 불렀습니다. 그때 저에게 잊히지 않은 한 장면이 있습니다.
전투경찰들이 시민 한 명을 곤봉으로 때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무력하게 얻어맞고 있었습니다. 그 시민의 눈빛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마치 저를 보고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어요. 전 너무도 화가 났습니다. 대학생이 될때까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습니다.
2008년 6월. 저는 보았습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한 여대생이 전경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별관 아래 골목에 드러누운 시민들을 전경들이 방패로 찍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부상당해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지난 연말 추운 겨울밤 한미FTA 폐기를 외치는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는 경찰들을 보았습니다. 1979년과 2008년의 풍경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한 해는 1984년입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정확히 일치하는 해입니다. 소설 속의 세계처럼 1984년의 사회 현실은 감시기관과 군인들에 의해 통제된 사회였습니다.
나는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했고, 곧이어 지하서클에 가입했습니다. 사회 비판의 목소리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곳은 학교와 성당과 교회였습니다. 사복 경찰들과 프락치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긴 했지만요.
당신들이 인터넷과 SNS, 팟캐스트로 소통하듯 우린 대자보와 유인물을 읽었습니다. 유인물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많은 학생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단지 리트윗을 한 이유로 검찰에 끌려간 박정근씨 소식을 들었습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더군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난 서글퍼졌습니다.
나는 '자유의 벽'에 나붙은 대자보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담은 사진과 글을 읽었습니다. 부마항쟁이 떠올랐습니다.
여전한 사회적 타살...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나는 5.18 거리투쟁에 참여하러 길을 나섰고, 경찰에 붙잡혀 연행되었습니다. 그후로도 몇 차례 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았고, 3학년 땐 3개월 남짓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때 다짐하며 쓴 글이 있습니다.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신념과 사상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86년 7월 8일의 편지에서)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이 부산구치소에 있습니다. 저 박종철도 송경동도 꿈을 꾼 이유로 잡혀갔습니다. 꿈꾸는 자 잡혀가는 세상. 하지만 시인의 신념과 사상은 구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1월 13일 대공분실에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제가 존경하는 수배중인 형의 소재를 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신체를 고문했지만 나의 꿈은 고문하지 못했습니다. 나를 고문한 수사관 조한경은 출소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뭔가? 나는 예수를 죽인 빌라도인가? 그래, 나는 빌라도가 맞을 것이다. 누군가가 빌라도 노릇을 해야 했다면, 역사를 만들기 위해 빌라도를 필요로 했다면, 내가 그 노릇을 한 게 아닌가?"저의 죽음은 조용히 묻혀버릴 뻔했습니다. 대부분의 의문사처럼요. 죽은 자는 있는데, 죽인 자가 없는 죽음. 이를 의문사라고 합니다. 의문사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저수지에서, 바닷가에서, 철로변에서, 동굴에서. 어디선가 고문과 폭행을 당하며 사람들은 소리 없이 죽어갔고, 버려졌습니다.
저의 죽음도 그렇게 잊힐 뻔했습니다. 경찰은 나를 고문한 날, 서둘러 화장하고 사건을 덮으려 했으니까요.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진실과 양심의 편에 서주었습니다. 의사 오연상과 부검의 황적준과 검사 최환. 이들의 용기 있는 증언과 노력으로 나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고문 사실이 폭로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이 신문사의 기자들입니다. 제가 세상을 떠난 날,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가 처음으로 소식을 알렸습니다. 매우 작게 실린 2단 기사였습니다. 보도지침 때문에 시국 관련 사건은 그보다 크게 실리기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런 기사를 쓰면 언제 잡혀갈지 모를 때였지요. 신문은 보도지침으로 통제했고, 정부가 원하는 기사만 실릴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일이 벌어져도 세상은 알 수 없었습니다.
<동아일보>의 기자들이 후속 보도를 하며 진실을 캤습니다. <동아일보>라니까 당신은 이맛살을 찌푸리는군요. 하지만 그때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는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은 보도지침을 뚫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선결적 자유'라는 것을 기자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동아일보>에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기자 정동익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언론은 성직입니다. 사명감을 지닌 사람이 기자가 돼야 해요.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권력과 재벌의 편이 아닌 99%인 민중들의 시각에서 보도해야 합니다." 언론의 자유가 사라진 땅에서 기자를 꿈꾸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나의 이름을 간직해 준 이들은 6월 항쟁 기간 동안 전국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박종철을 살려내라!"고 외친 시민들입니다. 6월 항쟁의 주역은 제가 아니라 바로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들입니다. 참여하는 시민들이 권력을 만들었고, 세상의 방향을 바꾸려 했습니다.
6월 항쟁으로 헌법이 개헌되었고, 직선제를 쟁취했습니다. 민주주의가 그때 겨우 시작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일은 시민들의 참여와 거대한 항쟁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양김의 분열로 다시 군사 정권과 보수 정권이 이어졌습니다.
"하루만이라도 인간의 모습을 한 사회에서 살고 싶었다"국가의 고문과 살인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용산에서 철거민들을 불태워 죽였고, 쌍용자동차에선 비인간적인 정리해고로 19명의 노동자들이 사회적 타살을 당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 목숨을 앗은 자들이 지금도 사회를 지배하며 기득권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에 재갈을 물리려 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순종적인 청년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나는 인간적인 삶을 꿈꾸었습니다. 1986년 3월 8일 저는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난 죽기 전에 단 하루만이라도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소망이다. 그리고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어떠한 모습으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