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민주열사 23주기 추모제(자료사진)
민주공원
하지만 형의 죽음은 내겐 (이렇게 말하는 저를 용서하세요) 조금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투표로 뽑는 것을 요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 책상을 치니 사람이 죽더라는 썰렁한 농담 같은 이야기로 누군가의 죽음을 숨기려 했던 그 시대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가능했던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제게는 믿기지 않을 따름입니다.
하늘에서 보는 한국의 모습은 어떤가요? 형이 살던 그때보다 많이 변했나요? 형이 다녔을, 침묵조차도 뜨거웠던 대학가는 예전 같지만은 않습니다. 정의를 외치며 형과 뛰어다녔던 젊은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1987년 6월의 함성 이후 태어난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확실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겠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자립이라는 말 속에는 대학등록금, 취업난, 면접 준비, 스펙, 경쟁, 그리고 또 경쟁입니다.
한편으로 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형들의 죽음이 무색할 만큼, 세상은 여전히 불의합니다. 국민에게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할 권력자들은 그 힘을 자기 자신의 사익을 위해 쓰고, 쥐고 있는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합니다. 대기업은 수많은 노동자들과 하청 중소기업의 기여를 인정하기는커녕 성공의 열매를 독차지하려 합니다. 소수의 가진 이들이 다수를 소외시키고, 그 격차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종철이 형.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뛰어드는 용기 대신,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으로 세상의 잘못을 모르쇠한다면, 형은 저에게 화를 내겠죠. 그래도 형이라면 왠지 저를 이해해줄 거라고 믿고 싶어요.
당신에게 동지가 있었듯이 나에게도 동지가 있습니다형. 우울한 척했지만, 실은 아주 잘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왜냐고요? 저는 형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오지 않을 젊음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으니까요. 세상의 어둠을 보며 자신을 잃을 듯 슬퍼지다가도, 이렇게 많은 시간이 있는데, 무엇이든 상상하고 도전해볼 수 있는데, 그리고 형에게 수많은 동지가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좋은 친구들이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요.
2012년은 분명 의미있는 한 해가 될 거예요. 형의 희생으로 열어젖힌 시대의 유산을 뛰어넘어, 안경 너머로 비치는 형의 그 눈빛을 닮은 젊은 세대가 다시 한 번 시대의 주역이 될 겁니다. 얼굴 없는 형과 형의 동지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실천이 모여 군사 독재를 끝장냈지요. 그와 같이 얼굴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재능과 아이디어로, 온라인과 SNS라는 무기로 우리 삶을, 이 시대를 새롭게 꾸려나갈 거예요.
지난 몇 년간 선거에서, 시위 현장에서, 미디어를 통해서 어리게만 취급받았던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제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 됐어요. 많은 젊은이들이 (물론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인 다른 분들도 함께) 명동으로, 부산으로, 시청 앞 광장으로, 대학 본부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생각하고, 기성세대가 제시한 행복의 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새롭게 일구어낼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온몸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거리로 나섰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 열정만큼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요.
곧 설이네요. 형의 넋도 고향 땅 부산을 밟으시겠죠. 그때마다 형을 가슴에 묻고 또 묻어야 하는 가족들의 아픔을 저는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소리 없이 속으로 울음을 삼켜야 하는 형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부디 살펴주시기를, 그리고 그들을 살피시는 형의 넋도 평안하시기를 빌어봅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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