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풍속화첩(보물 제527호) 중 <노상파안=노중상봉> 27.0×22.7㎝ 종이에 수묵 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의 3원 3재 이야기>는 이들 '3원 3재'로 일컬어지는 여섯 화가에 칠칠이 최북을 더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7인의 이야기다. 저자는 <명성황후를 찾아서>, <배오개 상인>,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 <조선의 읍성을 가다>, <경성상계> 등과 같은 책들을 쓴 소설가 박상하씨.
저자는 워낙 유명한 이름에 비해 그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들 화가들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소설과 에세이 형식을 섞어 들려준다.
흔히 최북을 두고 '왕실의 광대가 되기를 거부한 아웃사이더' 정도로 표현한다. 재주를 아까워하며 주변 사람들이 도화서에라도 들어가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살 것을 권했지만 그는 하루에 몇 말의 술을 마시며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기행으로 거침없이 살았단다. 돈과 권력, 명예에 빌붙어 편안하게 사는 대신 그림 사줄 사람들 사이를 술과 함께 떠돌면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중인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천민 출신인 그 스스로 시대의 기득권자들을 외면해버린 것은 아닐까? 그의 거침없는 기행 그 상대 대부분은 양반 혹은 기득권자들이기 일쑤다. 때문일까. 그의 거침없는 기행은 기득권자들에 대한 조롱과 반항처럼 들려 언제나 남다른 즐거움으로 읽힌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의문화유산답사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술 사학자 유홍준 선생은 이와 크게 다른 평가를 내라고 있다. '가느다란 필획으로 풀잎을 그리더라도 마치 낚시 바늘이나 노끈처럼(힘이 있는) 형상이 되지 않는 것이 없는, (어느) 화가들의 (일반적인) 의장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는 당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런 평가에 값하는 실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무엇보다 최북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상당 부분 과장되었거나 부풀려졌다는 지적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나의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에서 해박하고 화려한 지적 편린을 뽐냈던 유홍준 선생의 반박은 조목조목 날이 서 있으면서도 침착한 것이었다. 예컨대 '최북의 유작들을 보면 뛰어난 작품은 아주 드물고, 게다가 지루한 느낌마저 드는 평범한 작품이라든가, '최북은 문인화가로서의 기품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그러한 분위기는 있는 위인도 아니었다'랄지, 또한 '최북에게는 그러한 정성도 가량도 작자의식도 없었던 모양이다'라고 덧붙이면서…." -<조선의 3원 3재 이야기>에서한사람에 대해 모든 사람들의 평가가 일치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최북의 경우 그 차이가 유독 큰 것 같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한때 최북에 미쳐 살았던 그 소회를 밝히면서 최북에 대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 청장의 이와같은 평가를 조목조목 언급하고 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 청장은 위와 같은 평가에 덧붙였단다. "최북은 스스로가 말했듯이 단지 호생관에 불과한, 다시 말해 붓으로 그려먹고 산다는 것이 화가라는 자부심이 되지 못하고 그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의 형태가 되고만 셈이다. 호생관 최북의 인생은 예술로써 빛난 것이 아니라 단지 기인으로서 기록될 수밖에 없는 사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엇갈린 평가... 왜 저자는 최북에 집중했을까그렇다면 최북이란 이름은 기행 때문에 유명한가. 예술이 앞서는 인물인가. 그를 대표하는 그림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왜 쉽게 갈 수 있는 편안한 세월 대신 고단한 세월을 떠돌았을까. 저자의 말마따나(박스 기사 참고)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화가로 일컫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닐까. 책을 읽으며 나름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로 산수화를 얼마나 잘 그렸던지 당시 그를 '최산수화'라고 부르며 열광하는 문사들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그가 남긴 일화 중 상당수가 당시 먹고 살만한 사람들과 그림을 두고 벌어지는 것임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많이 원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인간됨을 혹평했던 이규상과 남공철마저 최북의 그림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여기에 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천재화가 '칠칠이' 최북을 '3원3재'에 이어 덧대어 붙이기로 작정했다. 위대한 예술이란 저주받고 추방당한 가난한 영혼으로부터 창조되어진다는,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화가의 독특한 영혼을 그들과 함께 결합시키고 싶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천재화가는 '3원3재'가 아니라 마땅히 '3원3재1칠칠이'여야 한다는 나의 오래된 생각을 한사코 옮겨보기로 한 것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