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뉴욕 맨해튼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월스트리트 점령' 피켓 시위를 하고 있는 시위대.
최경준
"우리는 99%다", "금융자본가의 탐욕을 중단시켜라."
20~30대의 젊은 청년 수백 명이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며 피켓을 들고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인 뉴욕증권거래소 앞으로 몰려들었을 때, 이들을 주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침낭과 텐트를 짊어진 이들이 공원에 자리를 깔고 노숙을 시작할 때에도 금방 흩어지고 말 젊은이들의 일시적인 치기 정도로 인식됐다.
하지만 첫 시위 이후 약 한 달 만인 10월 15일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미국 900여 개 도시, 전 세계 80여 개 국 1500여 개 도시에서 각 지역 이름을 딴 점령시위가 동시다발로 일어났다. 겨울이 시작되고 경찰의 강제 퇴거가 거듭되면서 시위대의 규모가 다소 줄었다. 하지만 2012년 새해를 앞둔 12월 31일 밤에도 월스트리트 인근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행진을 하는 등 그 기세는 여전히 꺾이지 않고 있다.
광고 촬영 장비를 실어 나르는 트럭운전사인 버크가 시위대에 합류한 것은 첫 시위가 있고 난 5일 뒤였다.
"미국이 위기에 빠져 있고, 나는 미국인으로서 이 자리에 와 있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일부 조직이 사람들의 돈을 빼앗으려는 목적으로 금융 상품을 디자인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미국에는 상·하의원이 있는데 어느 곳에서도 나 같이 평범하게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는 법은 통과시키지 않고 있다. 그런 위기감 속에 여기에 와 있다."그는 시위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가 파수꾼 역할을 자처했다. 밤에 시위대가 공원에서 잠이 들어도 그는 늘 깨어 있었다. 낮에 시위대가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면 경찰과의 충돌을 최소화하며 대열을 이끌었다. 시위대를 폭행하거나 연행하려는 경찰을 제지하는 것도 그였고, 경찰을 자극하면서 폭력을 유도하는 시위대를 진정시키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시위대는 공원 안에서 집단 노숙 투쟁 중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버크를 찾기 시작했다. 카리스마 넘치는 영화배우 율 브린너의 외모만 닮은 게 아니다. 평소 말이 없이 조용하면서도 사려 깊은 행동 때문에 젊은 시위대들은 그를 '큰형님'처럼 의지하고 따랐다.
실제 공식적인 리더가 없는 점령시위가 지난 100여 일간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버크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그는 늘 거리 행진에 나서는 시위대 앞에 서서 근엄한 표정으로 "절대 폭력을 쓰지 말라"고 당부한다. 시위대의 폭력이 곧 경찰의 폭력을 유발시킨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