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자님, 저희는 제주 동부경찰서 유치장으로 이동합니다. 잠시 후 휴대전화도 압수당하겠죠. 이럴 땐 제가 유명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26일 오후 4시 33분, 그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쪽지를 남겼습니다. 아침에 해군기지 건설 공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강정마을 주민과 평화활동가 27명이 경찰에 연행됐는데 그도 끼어있었습니다.
그는 강정마을에서 '강정평화학교'를 꾸리고 있습니다. 평화학교는 강정을 찾아온 이들에게 강정의 현실을 알리고, 함께 마을일을 돕고, 일인 시위 등 평화활동을 체험하는 평화프로그램입니다. 지난여름 그가 처음으로 제안해 벌써 5기가 '함께 공부하고, 일하고, 놀며' 평화를 체험했죠.
그가 평화학교를 하겠다며 제게 강의를 부탁했을 때 사실 저는 놀랐습니다. 왜냐면 저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동네 아이들과 노는 그의 모습만 많이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렇게 숫기 없는 이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겠다니!'
하지만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추진력으로 평화학교를 알뜰살뜰 꾸려나갔습니다. 강정평화학교는 이제 강정의 평화 아이콘 중 하나가 되었지요. 쉼 없이 자기의문을 던지고, 기복 없이 꾸준히 노력하는 그의 공이 큽니다.
평화학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었습니다. 그가 제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이라크 인간방패'라고 들어보셨어요?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침략할 때 '인간 방패'가 되어 이라크에 남아 미국의 공습을 반대했던 사람인데…. 저기, 만약 그 사람 중 한 사람이 강정마을에서 열심히 평화활동을 한다면 그게 강정마을을 지키는데 작은 보탬이라도 될까요?"
몹쓸 '기자병'이 도진 저는 "그럼요, 큰 뉴스죠"하고 반색하며 "그 사람이 강정마을에 와 있습니까? 그 사람 아세요?"라고 질문을 이었습니다. 그는 예의 말 없고 조용한 눈빛을 하더니 "아뇨, 그냥 그런 사람이 강정마을에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라고 말끝을 흐리더군요.
그리곤 그날의 대화를 다 잊어갈 즈음인 12월 11일 그에게서 쪽지가 왔습니다.
"지난 번 말씀드렸던, 이라크전쟁 때 인간방패 경험이 있는 활동가…. 사실은 제 얘기였구요. 그 경험과 이어진 한국에서의 시간이 많이 힘들어서 6년 전에 개명하고,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지난 6월 말 귀국했어요. 지난 몇 개월은 조용히 개인 활동가로 머물렀는데 지금 시점에서 혹시 이런 경험이 강정 상황에 약간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이렇게 상의 드립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이라크 인간방패'였다니…. 2003년 3월 14일, 미군이 바그다드에 폭격을 퍼부을 때 한국인으론 유일하게 '인간방패'로 남아 '전쟁반대'를 외치던 사람. 폭격이 끝난 후에도 이라크에 남아 중증장애인들의 벗이 되어 평화활동 하던 사람.
"가끔 한국 뉴스에서 미군 1명이 죽었다고 나오면, 그 열 배 이상의 이라크 사람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고 믿으면 된다"고 절규했던 사람. 그 잘났다는 미국 국무부 대변인이 "횃불로 날아드는 부나비"라고 이례적으로 조롱을 퍼부었던 사람. 그 사람 '유은하'가 강정에 있었다니, '유가일'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강정에 있었다니….
'인간방패' 유은하, 그가 강정에 있었다니!
사실 그는 이라크에서 '인간방패'를 자처하기 훨씬 전부터 여러 평화활동을 해온 이였습니다. 학창 시절엔 서울 이문동 동안교회를 다니며 동두천 기지촌 여성들을 상대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1998~2000년에는 중국 옌볜과 아프리카 케냐 등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의료봉사를 하기도 했구요. 말하자면 '평화'는 그에게 삶이자 종교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경험을 쉽게 말하지 못한 까닭은 "어떻게든 다시 알려지게 되었을 때, 마을 분들이나 활동가들의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할까 하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평화학교 일을 하게 되면서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이 일을 하게 됐는지 설명해야할 순간이 점차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저는 그에게 "강정마을 성탄절 촛불집회 때 자연스럽게 말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지만 그는 결국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라크에서의 경험이 아직 충분히 소화되지 않아서 어떻게든 다시 공적으로 얘기되는 게 겁이 난다"며 "마음이 흘러가고 정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입장을 존중키로 했습니다. 그가 '자수해서 광명 받아야할' 간첩도 아니고, 기사 쓸 욕심에 특정한 날의 경험이 지독한 트라우마가 되어 힘들어 하는 이를 더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채 하루도 넘기기 전에 그는 '묶인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26명의 마을주민과 평화활동가가 연행되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이라크에서 포탄이 쏟아지는 바그다드 한복판에서 인간방패를 자처했던 그는 강정마을에서 '평화지킴이'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개인이 아닌 '이라크 인간방패'를 자처했던 한 평화활동가가 강정마을에서 평화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됐다면 뉴스가 되지 않을까요? 특별한 죄목도 듣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한 마을에서 27명이나 연행되는데 대다수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질 않아요. 제가 이렇게라도 저를 드러내면 사람들이 강정마을에 관심을 가져 주는 작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는 그렇게 경찰서 유치장으로 가는 길에서 힘겨운 '자기 드러내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이 '더 유명하지 못한 사람'임을 아쉬워했습니다. 아마도 연예인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면 그 문제가 일시에 한국 사회 최대 현안이 되는 세태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적어도 지난 5년 동안 강정마을에 관심을 갖는 유명 인사들의 언급은 한정적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그들을 따르는 이들의 응원도 그만큼 약했던 게 사실입니다. 해서 그의 말은 지난 5년 동안 강정마을이 '육지 언론과 육지 여론'에게 받아온 지독한 외면에 대한 항거이기도 합니다.
"더 유명하지 못한 사람이어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