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31일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 주변 바닥분수 시운전 모습.
서울시청
서울 사람 중에 나보다 서울에서 오래 산 사람은 많겠지만 나보다 서울의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산 사람은 적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나는 강북의 동대문구 보문동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하여 같은 구 안암동·망우동, 종로구 원남동·이화동·충신동, 성북구 돈암동·삼선동·수유동·정릉동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30대 초반 강남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강남에서도 삼성동·반포동·청담동·방이동·논현동·대치동·도곡동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내가 서울에서 산 것은 1967년부터 2007년까지 40년 동안이었다. 대략 회고해 보니 10대·20대는 강북에서, 30대·40대 때는 강남에서 보냈으니, 공교롭게도 내 서울 생활은 전반기 20년과 후반기 20년이 각각 강북과 강남으로 갈리는 셈이다.
서울에서 오래 살았다고 해서 서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역사와 관련된 사실은 더욱 그런 것 같다. 일례로 나는 서울 미아동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미아(彌阿)'라는 이름이 낯설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불교의 '나무아미타불'에서 중간에 있는 두 글자 '아미'는 극락을 뜻한다. 그런데 미아리의 원래 이름은 '아미리'였다고 한다. 그것을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마구 음절을 도치시켜 미아리로 바꿨다고 한다. 옛날 아미리는 망우(忘憂, 세상 근심을 잊음)리처럼 대규모 공동묘지가 있던 땅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접하게 된 북촌과 남촌 중학 시절 나는 주말에 종로구 가회동에 있는 외가에 가끔 놀러 갔다. 그러고는 외사촌들과 함께 가까운 휘문학교(원서동)나 중앙학교(계동)에 가서 축구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 동네는 유달리 거리가 깨끗했고 유서 깊어 보이는 한옥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가르쳐주는 사람 또한 없었다.
나는 남산 기슭 필(筆)동에 있는 대학에 학생과 강사로 10년 넘게 다녔다. 필동 옆에는 묵(墨)동이 있었다. 필과 묵은 당연히 붓과 먹을 의미하지만 나는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충무로와 명동이 있어서 자주 놀러 갔다. 그러면서도 충무로와 명동이 서울의 핵심 도로라는 종로보다 왜 더 번화한지, 그리고 부근에 있는 고개 이름 '진고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위를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