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사망한 하청노동자 추도제 김석진 씨가 현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하청노동자 추도사를 하려하자 회사 관리자들이 몰려와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미포조선 하청노동자 제공
- 노조활동은 언제부터 관심 가졌고, 어떤 활동을 주로 해 왔는지…."87년 노동자 대투쟁 초기 저는 노동운동이 무엇인지도 깊이 있게 잘 몰랐습니다. 처음에 미포조선 노조 1대 노조체육부장을 맡고부터 지역의 여러 단체로부터 교육도 받고 학습도 하면서 조금씩 제대로 된 노동운동이 무엇인지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1980년 입사했으니까 그 당시엔 경비들에게 바리깡으로 머리를 잘린 경우도 있었고, 고과점수에 의해 상여금과 임금 인상에까지 심각한 손해를 보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87년 이전 대부분 노동자들이 겪은 일들을 저도 같이 겪었습니다. 풍물패, 노조대의원, 현장조직 의장을 지냈구요. 저는 주로 현장활동에 치중해 왔어요."
- 해고된 날 이후 삶의 어려움…."'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는 해고되기 전부터 혼자 벌어서 두 집 살림을 살았습니다. 지금도 두 집 살림을 살고 있구요. 가족 중 혼자 사시고, 지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형님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생활비도 제가 책임져야 할 상황이거든요. 저는 1997년 4월 14일부터 해고되어 2005년 8월 9일 복직되었습니다(해고기간이 무려 8년 4개월입니다). 해고되고 난 후 어머니는 늘 저에 대한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3년 7개월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시다 저의 복직도 못 보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는 코에 호스를 통해 음식물을 넘기셨고 목을 뚫어 가래를 뽑아내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아내가 저보다 더 힘든 생활을 해왔습니다. 숨을 제대로 쉬게 하기 위해서는 흡입 기계로 목구멍에 가래를 거의 30분마다 뽑아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에다가 중고 병원침대, 가래뽑는 흡입기계를 구입해 병원의 병실처럼 똑같이 만들었어요. 제일 힘들었던 것은 주·야 24시간 중 30분마다 기계로 가래를 뽑아야 하니 아내와 저가 돌아가면서 매일 밤을 꼬박 새워야 했던 일입니다. 두 집 살림을 살랴, 7살 10살 되는 두 딸 키우랴, 시어머니 병간호하랴, 회사 앞에서 180여 일 동안 철야노숙과 43일간 단식투쟁하는 남편 돌봐주랴, 남편의 복직투쟁 지지연대를 위해 지역집회에 가서 호소하랴…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이것이 지옥인가 싶었습니다. 경제적 궁핍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내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너무 고생을 많이 시킨 거 같아 미안한 생각뿐입니다."
- 구속된 후 국회의원에 출마한 적 있죠? 어떻게 해서 출마하게 되었고 그 과정 간단히 설명해주세요."복직투쟁 과정에서 구속되지는 않았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 지내다 나왔어요. 진보진영의 도움으로 해고기간 울산광역시의원으로 출마,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에 2차례 출마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노동탄압과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를 알려내기 위해 해고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출마하였던 것입니다."
- 대법원 판결이 나고 복직된 후 삶에 대해…."복직판결의 기쁨은 일순간뿐이었습니다. 복직 후 단체협약관련 회사와 소송이 벌어져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어 벌어진 사내하청 용인기업 복직 연대투쟁으로 민사소송, 형사소송, 벌금, 회사의 중징계, 노조의 중징계, 계속되는 병원치료에 하루하루가 힘겹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 지금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현대중공업 경비대 심야테러를 해결하라며 3년째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현장투쟁, 홍보물배포, 1인시위를 하며 싸워오고 있습니다. 아내와 두 딸도 함께하고 있는데 대기업도 저를 외면하고 현장 반원도 저를 외면하는데 가족이라도 함께해주니 그나마 힘이 납니다."
▲그의 억울함 호소얼마나 억울했으면 가족까지 나섰을까요?
현장투
- 건강상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지난 2009년 1월 17일 현대중공업 경비대 심야테러를 당한 후 3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우울증과 수면장애 등이 생겨 매일 3시간 정도라도 자고 싶은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전부터인 2009년 6월경부터 지금까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버티어 오고 있지만 갈수록 더 힘들어지네요. 2010년 2월경까진 수면제만 복용하며 지내왔으나 점점 증세가 악화되어 2010년 3월부터는 약을 한주먹씩 먹고 있는 중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병가휴직을 내고 병원요양치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내 또한 저와 비슷한 증상이 진행되어 정신과 치료와 약물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회사가 저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저를 이렇게까지 고달프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시달려 이젠 회사에 출근하기가 겁이 날 지경이랍니다."
노동자 권리 찾고자 하는데 정신장애로 고통 속에 살아야 하나
현대미포조선 노동자 김석진씨가 증언한 시달림 사례들 |
1. 2008. 12. 25. 김석진소속 반원들중 4명은 김석진의 노동운동으로 반원들의 고용이 불안하다며 김석진을 반에서 퇴출시켜야 한다.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편지를 김석진에게 보냄. 부서장은 이 편지를 근거로 김석진을 면담하였고 법률적 검토를 거쳐 특단의 조치를 위하겠다고 김석진에게 말함 (편지 4통 보관)
2. 2008. 12. 30. 김석진소속 반원 6명이 간담회를 하여 김석진이 제조직에서 탈퇴하지 않으면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김석진에게 보여줌 (결의문 내용보관)
3. 2009. 4월부터 노무관리자들 이른 새벽부터 김석진의 자택감시와 외출시 차량으로 미행함(차량미행은 현대자동차노조 영상팀에서 찍은 동영상을 증거로 보관)
4. 2009. 5월부터 출근시 출입문에서 현장사무실 입구까지 사내에서 경비대가 미행함 (사진 보관)
5. 2009. 2 - 2009. 9. 김석진소속 팀원들 명의로 김석진을 비방하는 3개의 현수막을 김석진이 출근하는 현장사무실 입구와 주변에 설치함. (사진보관)
6. 2009. 7월경 김석진이 작업시 자신을 비방하는 현수막에 둘러싸여 작업을 함 (사진보관)
7. 2009. 6.- 2011. 12 현재까지 김석진의 고유업무가 바뀜 (증거로 매일 작성하는 개인 작업일지 보관)
8. 2009. 2.- 2011. 12 현재까지 김석진이 매월 내는 팀회비를 팀에서 내지 말라고 하여 납부가 중단된 상태임. 팀회비는 팀원들간의 송년회, 회식비 등으로 사용되며 김석진이 팀회비를 내지 않음으로써 팀원들간의 모임에서 제외됨. 이는 바로 팀원들간에 행하여지는 야유회나, 길, 흉사시에도 불참으로 이어졌고 출,퇴근시 팀원들과 서로 인사나 대화를 하지 않게 됨. 결국 왕따가 됨.
9. 2009. 5월경부터 김석진의 상급자 담당반장이 점심시간 감시 목적으로 식당에 동행함. 담당 반장은 자의반 타의반 동행한다고 함 (음성녹음 보관)
10. 2009. 6월경 출근길 사내에서 김석진과 걸어가다 김석진과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모 조합원이 자신의 상급자로부터 질타를 당했다며 같이 걸어가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함 (음성녹음 보관)
11. 2011. 11월경 김석진의 상급자 조장이 점심시간 감시, 미행함 이에 항의하자 점심시간 안전사고예방을 위해 감시, 미행했다고 함. (감시, 미행 사진 및 음성녹음 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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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씨 아내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었으나 건강문제로 가정 방문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저는 조심스레 김석진씨에게 "그러면 회사 대표에게 바라는 글이라도 써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아내도 회사 노무관리자에게 얼마나 당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아내가 쓴 내용 원본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