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는 박정희 의장(1963.1.7)
연합뉴스
청소년 시절 박정희는 열 살 위인 황태성을 형보다 더 따랐다. 매년 설마다 세배를 다녔다. 박정희에겐 자신의 고민과 신상문제에 대해 조언해 줄 때 지적 깊이가 느껴지는 황태성이 인생의 멘토였다. 대구사범에 진학할 때 황태성에게 찾아가 의논했고 후에 만주군관학교에 갈 때도 그와 깊이 상의했다.
황태성은 보통 사회주의자들이 반대할 법한 군관학교 지원에 대해서도 박정희를 격려해 주었다. 박정희가 1946년 10월 영남 민중봉기를 전후해서 남로당에 가입할 때도 황태성이 보증을 서줄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황태성은 남한의 실권자가 된 박정희를 찾아가면 뜻대로 대타협이 이루어지진 않더라도 최소한 신변 위험은 없으리라 판단했다. 박정희뿐 아니라 그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장 김종필도 황태성이 중매한 박상희와 조귀〇 부부의 사위였다.
1947년 9월 월북한 황태성은 1948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돼 북한의 권력층에 진입한다. 이후 그는 상업성 관리국장에 이어 무역성 부상과 무역상 서리까지 지냈다. 북한 상업성과 무역성의 핵심 자리를 거친 경제통이었다.
1961년 8월 초 남한에 밀사로 가기로 한 황태성은 그후 한달 가까이 평양시 서구에 있는 로동당 연락부 아지트에서 당 기술간부로부터 남파활동에 필요한 기술교육과 교양학습을 받는다. 교육이 끝난 후 그는 8월 말 평양을 출발, 개성에서 호송원의 안내로 임진강을 건너 문산 방면의 야산을 타고 8월 30일 밤 우이동에 도착했다. 이어 산에서 내려와 합승차 편으로 서울 중심부로 들어왔다.
서해 첩보부대 북한 측 비밀접촉...쿠데타 안착 시간 벌기 그러는 사이 서해의 북한 지역 용매도와 불당포에서는 남북 군사정보 당국 간에 비밀접촉이 진행되고 있었다. 남한의 수석대표 강성국 중령과 보좌관 김석순 대위 등으로 이루어진 대표단이 북한 지역에 들어가 회담을 했다. 의제는 남북 간의 경제교류, 문화교류, 인사교류 등이었다.
두어 차례 회담을 했을 때 북한 쪽 실무책임자가 김석순 대위에게 다가와 귀띔했다.
"우리 당 연락부에서 남쪽에 특사를 내려보낼 겁네다. 특사는 남과 북의 최고위층이 믿을 만한 간부급이지요. 내각 부상까지 지낸 이 분이야요." 그는 김석순에게 황태성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김석순이 이 같은 정황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고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후에 김종필은 "그때 남북 장교들의 접촉은 첩보부대에서 정보수집 차원에서 한 것"이라고 회고했다. 보고는 받았지만 무게있게 추진된 남북회담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당시 서해상의 대북 비밀접촉이 첩보부대 HID가 벌인 대북 공작의 일환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쿠데타 정권이 안착할 때까지 북한과 접촉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벌자는 것이 '첩보극'의 목적이었다. 남북관계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순수하지 않게 이용하는 박정희 정권의 행태가 여기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남한 첩보부대의 그 대북접촉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황태성을 밀사로 내려보내게 한 상당한 동기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황태성이 서울에 도착한 후 맨 먼저 찾아간 사람은 동양통신사 사장이던 김성곤. 김성곤은 대구 출신 유지들의 중심인물로 황태성과도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 IPI 총회 참석차 해외 출장 중이었다.
그러자 황태성은 돈암동 태극당 뒤에 있던 최고회의의장 공관으로 박정희를 직접 찾아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경비가 삼엄했다. 이어 청파동의 김종필 자택 앞에도 가보았으나 중앙정보부장인 그의 집도 경비가 심해서 포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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