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만주군관학교시절의 박정희
여기서 박정희는 첫 번째 변신으로 소학교 교사에서 일본군 장교로 인생행로를 바꾸었다. 일제는 학교 교사를 상당히 우대했다. 황국신민화 정책을 시행하려면 학교 교사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인으로 말단 공무원인 면서기를 하면 시골에서는 그런대로 잘 살았다. 그런데 면서기 월급이 20원일 때 사범학교 학생에게 매달 지급되는 관급 장학금이 25원이었다. 교사가 되면 월급은 물론 일반 공무원보다 훨씬 많았다. 더구나 선생은 사회적으로 존경도 받고 안정적인 직업이었다. 박정희는 그런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지원한 것이다.
박정희는 군관학교에 지원한 이유에 대해 "긴 칼을 차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어린애도 아니고 교사 생활을 3년이나 경험한 사회인이 단순히 긴 칼을 차고 싶어서 군관학교에 갔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 그가 차고 싶었던 '긴 칼'이란 바로 권력의 상징, 그것이었다.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권력의지와 출세주의에 사로잡힌 박정희의 첫 결단이었다. 군국주의 일본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군 장교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에 대해서 겨우 육군 중위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군국주의 체제 아래서 중위란 시골 군수나 경찰서장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위상이었다. 박정희가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써 가면서 교사직을 버리고 군관학교에 지원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정희가 입학한 신경의 만주군관학교 2기생은 모두 250명으로 조선인은 12명이었다. 이 중엔 5.16쿠데타 때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도 있었다. 박정희는 어렵게 입학한 만큼 만주 군관학교에서 열과 성을 다했다. 나이도 동기생보다 4~5세나 위이고 사회생활도 그 만큼 많은 박정희는 군관학교 2년 과정을 1등으로 졸업했다. 그는 성적우수자로서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는 영예를 누렸다. 이때 이한림도 우등 졸업자로 함께 육사에 입학했다.
일본 육사에서도 박정희는 철저한 '황군정신'으로 무장하고 열심히 군사훈련에 임했다. 일본 사무라이를 동경한 그는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었고 충성스런 생도였다. 육사 졸업성적은 전체 3등,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육군 대신상을 수상했다.
만주군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사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그가 단순히 학습능력이 뛰어난 수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구사범에 진학한 것 자체가 수재라고 하지만 거기서의 성적은 꼴찌였다. 대구사범 때 그의 성적을 보면 4학년 73명 가운데 73등, 5학년 70명 가운데 69등이었다. 이렇게 사범학교 때 열등생이 군관학교에서 우등생이 된 것은 오로지 황군정신과 사무라이에 대한 흠모가 에너지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카키 마사오...그리고 광복군으로의 변신 박정희는 이후 1944년 12월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군 보병소위로 임관해 일제 패망 직전까지 만주군 중위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군국주의 일본 군 장교로의 변신은 노력에 비해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기 때문에 막차를 탄 꼴밖에 안됐던 셈이었다.
박정희의 두 번째 변신은 창씨개명이다. 물론 일제가 강제로 시행한 창씨개명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박정희는 처음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개명했다. 당시 조선인들이 흔히 하던 대로 원래의 성과 조선식 이름을 그 안에 담았다. 다카키(高木)은 고령 박씨에서 연유했고 마사오(正雄)는 정희(正熙)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그러나 2차로 완연한 일본식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개명했다는 논란도 있다.
박정희의 세 번째 변신은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군의 적군에 해당하는 우리 광복군으로 재빨리 찾아 들어간 것이다. 박정희의 후손들은 그가 복무한 만주군은 일본군이 아니며 독립군이나 광복군을 토벌한 부대가 아니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의 군대는 일본 관동군의 통제를 받았다.
이때 학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광복군에 와 있던 장준하는 박정희의 일본군 출신 전력을 지적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도 이렇게 입장차이가 분명했다. 장준하가 일본이 패망하지 전이지만 부역하기 싫어서 탈출했다면 박정희는 세상이 달라진 뒤 변신으로 광복군에 찾아간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의 행적을 더듬어 보면 일본 육사 졸업 후 그는 본토 제14연대에 배속된다. 얼마 안 있어 그는 만주 모란강 부근의 영안에 주둔한 만주군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박정희가 만주군 소대장으로 주둔한 영안은 간도의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 머무르던 우리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열하는 일본군에 대한 항일투쟁이 치열했던 지역이다. 여기서 항일세력은 중국공산당의 팔로군, 중국국민당의 장개석이 지휘하는 국부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 그리고 소규모의 게릴라부대들이 있었다.
만주군 장교로서 박정희가 직접 우리 독립군부대나 광복군을 토벌했는지 여부는 아직 근거 있게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러나 당시 주둔지의 항일세력에 대한 적군인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일본 관동군이나 만주군이 광복군의 적군임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일제의 패망과 한반도 해방이라는 뜻밖의 소식이 만주의 서쪽 변방인 열하에 복무하던 박정희에게 전해진 것은 8월 17일이었다. 박정희는 같은 부대에 있던 만주군관학교 선배들인 신현준 상위와 이주일 중위(5.16 쿠데타 후 최고회의 부의장)등과 상의하고 북경으로 가기로 했다. 이들이 9월 21일 경 북경에 도착했을 때는 그 주변지역 일본군에 복무하던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당시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국의 일본군에 복무하는 10여만 명의 조선인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중국이나 연합국 측의 미국은 이 계획에 무관심했고 임시정부가 10여만 병력을 무장시키고 조직화할 능력은 없었다. 어쨌든 박정희가 도착한 북경에는 최용덕을 광복군 지대장으로 한 북평잠편지대가 설치됐고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광복군에 들어갔다.
그가 광복군에 들어 간 것은 그 독립정신이나 이념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단지 해방된 한반도에서 광복군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쪽으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거기다 아무 연고도 없는 중국 땅에서 귀국을 모색하는 가장 좋은 방책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