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설 교수
문학동네
-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 교수님을 강하게 비판을 했는데 그동안 대응을 하지 않다가 인터뷰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이렇게 무턱대고 비난만 퍼붓는 책에는 '무대응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비논리적 주장에 빠져드는 분도 있고, 주위의 권유도 있어서 반론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더욱이 나를 비난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보듬고 지키다가 목숨까지 잃은 조선어학회사건 관련 국어학자들을 친일파로 비난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 노론의 후예가 친일파가 되고 해방 후 집권층이 됐으며, 노론사학이 식민사관으로 그리고 현재 역사학계의 주류로 이어졌다는 것이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의 주장이다. 이에 대한 의견은?"이 책은 이덕일 소장을 비판한 네 학자들에 대한 비난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자칫 잘못 읽으면 현재의 집권층과 주류 사학계를 비판한 책처럼 이해하게 된다. 물론 이 집권층에 대한 비판도 잘못이긴 하다. 시대착오적이고 과대망상적이다. 지금 집권층 가운데 노론 후예가 누가 있나? 이름을 대보기 바란다. 대통령이 노론 후예인가, 총리가 노론 후예인가? 노론이 친일파가 됐다는데, 정말 조선을 망하게 한 것이 노론인가? 내가 보기에는 노론을 포함해 왕족과 양반 등 지배계급 모두가 조선을 망쳤다.
소론이나 남인이 집권했으면 강한 조선이 됐겠는가? 또 식민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친일파가 현재의 집권층이라는 주장은 <친일인명사전> 등으로 따져서 가릴 일이다. 무턱대고 '어떤 집단은 모두 친일 후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 이 기회를 통해 분명히 할 것은 우리 집안은 노론도 아니고 친일파도 아니라는 점이다. 더 확실하게 말하면 우리 선조는 노론이나 소론으로 분류할 수 없는 시골사람에 불과했고, 드러나게 친일을 할 위치에 오르지도 못했다. 또 나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쓴 역사서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물론 내 책에서 인용한 일도 거의 없다. 이런 사정은 함께 비난 당한 다른 세 교수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다. 이런 네 학자들을 '노론·친일·식민사관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다.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은 '(이덕일 소장을 비판한) 네 학자들이 모두 서울대 출신으로 식민사관에 찌든 사람인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사실 네 명 가운데 한 명만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이고 다른 세 명은 서울대 국문학과·연세대 국문학과·고려대 사학과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국문학계도 식민사관에 찌든 친일파'라며, 그 예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들었다. '일제가 만든 언문철자법을 친일 국어학자들이 베껴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예들이 지금 국립국어원과 서울대 국문과에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책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엄청난 고초를 겪은 선배 학자들을 친일파로 몰고 있다."
- 국어학자들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걸려 감옥에까지 가지 않았나?"대한제국 때 국문연구소를 만들고, 국문운동을 시작하자마자 나라가 망했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언어 정리가 필요해 언문철자법을 만들 때 일본인 연구자들과 국문연구소 사람들이 가담했다. 그 후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들었는데 이전 작업들을 모두 참고해서 만들었다. 몇년 새에 언어 현상이 확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1912년의 언문철자법과 1933년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유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가지고 친일 식민 언어학자라고 하는 것은 너무한 도발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한글을 연구하는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들에게 독립운동 혐의를 씌워 검거·투옥한 사건이다. 그때 감옥에 갇힌 수십 명의 국어학자 가운데 이윤재, 한징 두 분은 차디찬 감옥에서 절명하셨다. 이런 분들을 친일파로 몰다니 도대체 자신들은 무슨 독립운동을 했는지 되묻고 싶다.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대한 이덕일 소장의 논리는 정음연구회 최성철 회장의 논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덕일 소장 주장의 '프레임'은 최 회장의 것이라는 이야기다. 올해 한글날에 이덕일 소장이 한 신문에 쓴 칼럼 '세종의 꾸짖음'은 올 초에 최성철 회장이 한글학회 홈페이지에 올린 '세종성왕의 진노'와 내용과 표현 방식이 거의 같다. 이덕일 소장은 자신이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지만 사실은 남의 말을 옮긴 것이고, 그 내용은 세종대왕을 높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애국지사를 능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덕일 소장이나 최성철 회장, 둘 다 무슨 대단한 애국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말 사랑에 목숨까지 바친 순국 지사들을 친일파로 몰고 있다. 문제가 심각하다."
반역 때문에 죽은 사도세자... '안 미쳤다'는 것은 설득력 없어- <길 잃은 역사대중화>에서 '<사도세자의 고백>이 역사서로서 전혀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는데 심하지 않은가? 그래도 10년 넘게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인데."그쪽이 말하고자 하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덕일 소장의 책은 대중들이 받아들인 책인데 네가 왜 아니라고 하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대중에게 많이 팔린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설이라고 할 수 없다. <사도세자의 고백>에 제시된 논거 중 제대로 된 증거를 갖춘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스물두 살이 되도록 영조의 왕릉 행차에 한 번도 따라가지 못했다고 했다. 이덕일 소장은 '영조가 태조의 묘인 태묘(太廟)에 갈 때 여러 번 사도세자와 간 기록이 있다'며 거짓말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덕일 소장의 사료해독 수준을 보여주는 오류이다. 태묘는 태조의 묘가 아니라 종묘다. 사도세자는 멀리 있는 태조의 능에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동궁과 붙어있는 종묘에 갔던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비판했더니 이주한 연구위원은 '태묘를 종묘로 고쳤는데 이전 책을 가지고 뭐라고 한다'고 했다. 또한 이덕일 소장은 '지엽말단적인 부분만 문제 삼아 막무가내로 (나를) 학자가 아니라고 몰아붙이고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것은 태묘를 종묘로 수정했다고 끝나는 단순 오자의 문제가 아니다. 이덕일 소장, 이주한 연구위원의 주장은 <한중록>이 거짓이라며, 왕릉 행차에 여러 번 따라갔다며 증거로 제시한 내용이다.
또한 <사도세자의 고백>에 제시된 사료 해석에는 초보적 수준의 실수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령 '사도세자의 온양 거둥(왕의 행차)이 호위 병력만 520명이나 되는 장엄한 행렬이었다'며, '<한중록>에서 쓸쓸한 행렬이었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왕의 행차에는 통상 4000명 이상의 호위 군인들이 동원된다. <영조실록>에는 사도세자의 행렬이 쓸쓸하고 초라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까지 있다. (내가) 이것을 지적했더니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 1000명의 행차였다고 슬그머니 말을 바꾸기도 했다.
정조가 노론 김조순과 사돈 맺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덕일 소장은 '정조가 김조순하고는 혼사를 안 하려고 했는데 꿈을 꾸고 뜻을 바꿨고, 그 꿈을 잘못 해석한 것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말이 되나? 정조가 총명한 임금이라 주장하면서 바보처럼 좋은 꿈 때문에 판단을 바꾸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영춘옥음기>(김조순이 남긴 기록) 등 다른 기록들을 보면, (정조가) 꿈꾸기 훨씬 전부터 김조순 쪽을 점지한 흔적들이 있다. 정조는 현실적인 이유로 김조순을 간택했을 것이다. <정조실록>에서 꿈 이야기를 한 것은 덕담 정도로 봐야 한다. 게다가 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그런 것을 마치 핵심 이유인 것처럼 사료를 해석했다. 사료를 피상적으로만 읽고 있다는 이야기다. 소설가라면 몰라도 역사가가 사료를 이렇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이덕일 소장은 사도세자가 '당쟁' 때문에 희생됐다고 하는데, 이것이 아니라면 사도세자가 미쳐서 영조가 죽였다는 것인가?"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는 당쟁이 아니라 반역죄 때문이다.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사도세자가 미쳤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미쳐서 한 짓이니까 용서해 주자'는 뜻이었다. 그 사실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때 내린 <폐세자반교>에도 나와 있다. <한중록>에도 반역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맥락을 그렇게 읽을 수 있도록 적혀 있다. 물론 '사도세자가 미쳤다, 미치지 않았다'고 100%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학자로서 판단할 때는 미쳤다고 주장한 기록들의 근거들이 훨씬 합리적으로 이해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료비판을 통해서 볼 때, 미치지 않았다는 기록과 주장들은 설득력이 거의 없다."
대중 역사서의 옥석 가리기에 학계가 적극적으로 나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