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다산초당 출판, 신정일 저) 책 표지.
다산초당
1589년(선조 22년), 조선왕조 최대 옥사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000여 명의 선비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대 피바람이 분 이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사가들은 이 사건을 "정여립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로 기록했다.
옥사의 공식문건인 <기축옥안>은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소실돼 당시의 기록은 단편적이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의 '선조수정실록'과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의 '선조조고사본말', 저자 미상의 <대동야승> 등에 일부가 전해진다.
기축옥사는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의 주도로 동인 세력을 탄압하는 당쟁으로 비화되었는데, 그 희생자들 대분이 호남의 동인들이었다. 일각에서는 이를 "조선시대의 광주사태"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정여립의 모반에서 비롯된 최대 옥사"라고 해놓고 정작 모반 자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정여립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론'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 등 왕권 체제하에선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지닌 사상가였다. 평등주의와 개혁·상생을 주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주에서 첨정을 지낸 정희증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통솔력이 있고 명석했으며, 제자백가에도 통달했다고 전해진다. 1570년(선조 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이 된 그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 있으면서 서인에 속했다.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에 가담하여 왕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신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전북 진안군 죽도에 서실을 세워 활쏘기 모임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죽도선생'이라고도 불렸다.
1589년(선조 22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은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밀고했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정옥남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한다. 그의 아들은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는데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인물들이 바로 정철 등의 서인이었다.
동인의 명사 중에서 이발·이호·백유양·유몽정·최영경 등이 단지 정여립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처형됐고, 정언신·정언지·정개청 등이 유배됐다. '정여립 옥사'는 2년에 걸려 처리되었고, 이때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다. 문제는 그 후 전라도가 '반역지향'이라 불리고, 인재 등용에 제한이 가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당시 옥사가 '모반'인가, '혁명'인가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역모사건>(다산초당 출판, 신정일 저) 저자 신정일씨는 "역모사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며 "때문에 지금 알려진 역사의 반대편에 선 인물들은 악인으로 낙인이 찍혀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름조차 남지 않게 됐다"며 밝혔다.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귀천의 씨가 없다. 천하는 백성들의 것이지 임금 한 사람이 주인이 될 수는 없다. 누구든 섬기면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며 정여립을 단순한 혁명가가 아닌 동양의 위인으로까지 드높였다.
그는 또한 기축옥사를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반정사건으로 규정한다. 이를 계기로 선비들이 관용의 정신을 잃고 죽고 죽이는 당쟁으로 비화됐다고 본다. 정여립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제대로 기록되기만 했더라도 '반역'이란 딱지는 붙지 않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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