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진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환자분들
최성규
멀어서, 아파서, 바빠서... 쉽게 올 수 없는 보건지소 자연환경이 발목을 잡을 때도 있다. 남양면 근처에는 우도라는 섬이 있는데, 경기도의 제부도처럼 하루에 두 번 간조 때마다 물길이 열린다. 길이 생겼을 때 빨리 나와서 용무를 보고 급히 돌아가야 한다. 물때는 날마다 조금씩 변하는데, 일과시간에 썰물이 한 번만 끼어 있을 때는 보건지소까지 올 여유가 없다. 나는 그 분들이 오시면 진료기록부에 '섬나라에서 오신 분'이라고 적어 놓는다. 몇 달 전에 오고 깜깜 무소식인 그들을 오늘도 기다려본다.
걸어서 올 만큼 가까운 거리에 사는 분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남양보건지소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정류소 겸 슈퍼가 하나 있다. 슈퍼 주인 최선순 할머니(72). 시골 마을의 허름한 슈퍼지만, 드문드문 버스표나 간식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손님이 언제 올지 몰라, 잠깐의 짬을 내기 힘들다. 추석 즈음에는 아들이 내려와 있어 편하게 맡기고 침을 맞으러 오셨지만 그것도 잠시.
며칠 전에는 급하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갑자기 오금 근처에 이상이 생겨서 걷기가 영 불편하다고 한다. 평소보다 걸음걸이를 저는 게 보인다.
"슈퍼는 어떻게 하시고 오셨어요?""내가 아파 죽겠는데…. 신경도 안 쓰고 왔네."진찰을 했더니, 슬와부 근처 대퇴이두근건과 주변 인대에 이상이 생겼다. 일반 침을 쓰면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아 화침(火針)과 칼텐보른(Kaltenborn) 수기법을 적용했다. 유침(침을 꽂아두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시술시간이 짧은 것이다. 치료가 끝나자마자 급하게 가시려는 모습에 한마디 했다.
"어머님, 그렇게 급하게 가면 다리에 무리 생겨요. 천천히. 천천히. 알았죠?"손님은 거의 없어도 슈퍼는 슈퍼인가 보다.
"그렇게 바빠서 치료나 제대로 받겠습니까?"동네에서 가장 젊은 새댁 중 한 명인 제갈혜숙씨(30)는 농사일을 하느라 오른 손목이 부었다. 동네에서도 손꼽힐 만큼 밭이 큰 데다가, 남편은 먼 데 돈 벌러 나가서 농사일은 온전히 자기 차지다. 진료를 받는 도중에도 "선생님, 얼마나 걸려요? 오래 걸려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렇게 바빠서 치료나 제대로 받겠습니까?"라고 톡 쏘아도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손목 치료하고 또 삽질하러 간다는 말에 급히 테이핑을 붙여주었다. 테이핑요법은 혈액과 림프의 순환을 도와주는데, 일상생활에서도 치료효과가 지속되는 특징이 있어서 일할 때 약간이나마 통증을 줄이려고 붙인 것이다.
다음 날 다시 손목이 부어서 내원했다. 이번에는 시간이 없어서 상담만 받고 가겠다고 말을 꺼낸다. 시간이 없는 환자를 위한 응급조치가 필요했다. 아이스팩 출동. 밭에 가는 동안이라도 손목에 아이스팩을 올려놓으라고 했다.
"3분 댔다가 1분 떼고. 이렇게 다섯 번 하세요. 그럼 20분이잖아요. 이걸 하루에 세 번. 알았죠?"아무리 바빠도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면 괜찮다. 어제는 초진환자가 왔는데, 주소를 보니 근처 마을이라 왜 지금껏 안 왔는지 물어보았다. 이유는 시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공공근로' 사업에 참여하시는 오정숙 아주머니(53). 요즘에는 소록도로 일을 다니게 되었다. 아침 7시 40분경에 출발해서 저녁 6시에 다시 남양면으로 돌아오는 그녀. 비가 오거나 닫력에 빨간 날만 쉬는 공공근로의 특성상 진료소에 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비가 자주 내리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집도 가깝고 할 일이 없는데도 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것이다. 중풍 후유증으로 오른쪽이 마비된 신야방 할머니(71). 간병인이 휠체어로 모시고 오지 않는 한 보건지소에 올 수가 없다. 예전에 잘 챙겨주던 남편분도 몸이 안 좋아서 그만 한 정성을 쏟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