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영장한 징용대상자에게 1945년 1월 13일 오전 9시까지 대전부청 공회당에 출두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소장
지원자 적자 할당량 정해 강제 연행... 응하지 않으면 처벌다음으로 조선인 강제동원의 실태는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요? 즉 강제 동원된 전체 인원은 대략 얼마나 되며, 또 그들은 강제노역 현장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징용 대상자들에게도 군 입대자처럼 영서(令書), 즉 영장(令狀)이 발부되었습니다. 일본 본토의 경우 후생대신(厚生大臣)이, 조선(한국)에서는 일왕의 대리권자인 조선총독이 발급했습니다. 초창기 징용은 조선인의 반발을 우려해 지원 형식을 취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보다 신청자가 적어 필요한 숫자를 채우지 못하게 되자 총독부는 할 수 없이 동네별로 할당량을 정해 목표를 채우도록 강요했습니다.
당시 징용 영장을 받은 자는 지정된 사업장에 가서 복무하도록 돼 있었는데,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일파나 지역유지 등 힘있는 자들은 대부분 빠졌고,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서민들이 그 머릿수를 채우곤 했습니다.
한편 효율적인 노동력 동원을 위해 일제는 1939년 1월 7일자로 '국민직업능력신고령'을 공포했는데 조선에서는 6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이어 그해 7월 일본 내무성과 후생성은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 발표를 통해 조선인 노동자 강제연행의 근거를 마련하였는데, 총독부가 9월 1일에 각 도지사 앞으로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취체요강(要綱)'을 통보함으로써 공식 발효되었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단계별로 '모집'(1939.9~1942.1), '관(官)알선'(1942.2~ 1944.8), '강제징용'(1944.9~1945.8) 등으로 나누어 조선인 노무자 동원을 실시하였습니다. 시기적인 차이는 있지만 이 모두는 사실상 강제동원이었고, 또 노동력을 수탈했다는 점에서 흔히 '강제연행'으로 통칭되고 있습니다.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한국정부는 일제하 노동자·군인·군속 등으로 강제 동원된 한국인 피해자는 103만 2684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배상 대상자인 사망자 숫자 2만 1919명(군인 6178명, 군속 1만 5741명)만 밝혔을 뿐 전체 강제동원 숫자와 명부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간 국내에서 알려져 온 바로는 "한반도에서 600여 만 명이 강제동원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70여만 명이 해외로 강제연행됐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1990년 4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일본정부는 강제연행자 명부 일부를 공개하였는데, 그 숫자는 7만1476명으로 실제 인원수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습니다.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자료가 발굴된 것은 그 이듬해 1991년초의 일입니다. 동경제대 재학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끌려갔던 정기영씨(전 '1.20동지회' 부회장, 작고)는 학도병 출신자들의 모임인 1.20동지회 <회보> 제32호(1991.1.20)에서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을 입수해 공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 송출 등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으로,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이 가운데는 도내동원(1938~1945)이 536만여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관(官)알선'(1934~1945) 42만2397명, 현원징용 26만145명, 국민징용 4만3679명, 군요원 3만3861명 등으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징병, 학도병, 일본군위안부까지 합칠 경우 전체 강제동원 피해자 숫자는 거의 800만명에 육박)
이들 가운데 '도내동원', 즉 조선 내 동원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동남아, 심지어 남양군도까지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북해도로 징용된 박원순 후보의 작은 할아버지도 이들 가운데 한 명인 셈입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징용자들의 경우 대개 탄광이나 군수공장 등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으며, 군속으로 차출된 경우 일본이 침략한 동남아 지역의 군사기지 건설이나 철도 공사에 동원되었습니다.
특히 군속의 경우 전후 재판에서 B·C급 전범(戰犯)으로 몰려 희생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사할린 징용 조선인들의 경우 냉전으로 인해 한동안 고국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으며, 이마저도 살아남은 자들의 경우이며 죽은 자들은 아직도 타국땅에서 고혼으로 떠돌고 있는 실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