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호 자서전 <한 삶의 고백> 표지
현석호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통해 친일을 사죄한 사람도 있습니다. 제2공화국 시절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玄錫虎, 1998년 작고)는 1986년 <한 삶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1907년 경북 예천 태생으로 경성제대 재학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그는 전라남도 경부를 거쳐 1936년 화순 군수가 되었으며, 이어 황해도 산업과장, 총독부 사무관을 거쳐 충청남도 광공부장으로 재직하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는 자서전 첫머리의 '회고와 참회'에서 아래와 같이 고백했습니다.
"해방되던 날부터 나는 친일관리로서의 거취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다. 나 개인으로서는 양심적으로 부끄러운 일은 없지만 일정 때 고급관리로서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대열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일과 출세를 위해 힘쓴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해방과 독립이 일본의 패망과 미국의 승리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궁극적인 원인이 조선민족의 독립을 위해 3.1운동을 비롯한 국내외의 투쟁에서 뼈를 갈고 피를 뿌린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공로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같은 사람은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관리생활 동안에 피부로 느꼈던 차별대우와 모멸감에서 해방된 기쁨과 감격은 남 못지않게 큰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도의적 죄책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만주군관학교를 나와 간도특설대에서 중대장(대위)으로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신현준(申鉉俊, 2007년 작고) 초대 해병대사령관도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989년 <노해병의 회고록>을 펴냈는데, 자신의 감추고 싶은 부분이랄 수 있는 만주군 시절을 소상히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일본군(만주군)에 복무했던 인사들 가운데 회고록을 펴낸 자가 적지 않으나 그처럼 당시의 일을 가감 없이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그가 유일합니다. 90년대 중반 인터뷰 차 경기도 평택에 있던 그의 자택을 방문한 필자에게도 당시 상황을 소상히 얘기해줬고, 또 그때의 일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일제 때 군수가 뭘 하는지 알고 맡았다면 친일파"일각에서 "상습적 양심선언가"라는 핀잔까지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부끄러운 지난날을 고백한 이항녕(李恒寧, 2008년 작고) 박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충남 아산 출신으로 경성제대 재학시절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 그는 해방 때까지 하동군수와 창녕군수를 지냈습니다. 해방 후 근신 차원에서 경남 양산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그는 이후 동아대 교수, 문교부 차관, 홍익대 총장 등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제 때 고등관인 군수가 뭘 하는 자리인 줄 알고 맡았다면 모두 친일파"라며 자신도 당연히 친일파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1960년대 초 수필과 신문에 연재한 자전적 소설을 통해 자신의 친일행적을 참회하였으며, 1991년에는 자신이 잠시 군수로 근무했던 하동군에 가서 군민들에게 일제말기 공출 강요 등에 대해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1980년 1월 26일자 <조선일보>에 '나를 손가락질 해다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는데요, 이는 참회문의 대표글로 삼을 만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매목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하루라도 더 오래 안일한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더러운 욕망은 하필 오늘의 나의 철학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내가 만고불멸의 철칙으로 알고 지켜온 나의 확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이 확신을 저주합니다. 나는 한일합방 때 절개를 지킨 애국자의 자손들이 곤궁하게 살고 있는데 친일파의 자손들이 지금까지도 잘 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중략) 나는 일제시대에 그들에게 아부한 사람들은 잘 살았고, 그 자손들도 좋은 교육을 받아 지금까지도 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입니다.(중략) 나는 일제 때 그들에게 붙어서 민족의식을 상실한 것을 해방 직후에는 부끄럽게 생각했었으나 그 뒤 얼마 안 가서 나의 일제 행각에 대한 정당한 변명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은 시세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끝으로 파인 김동환(金東煥, 6.25 때 납북) 얘기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초창기에는 '국경의 밤' 등 민족적 면모가 강한 시를 썼던 파인은 일제말기 친일로 변절해 삶에 오명을 남겼습니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에 자수(2.28)했으나 최종 재판에서 '공민권정지 7년'을 선고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