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지형흐르던 물이 바위를 만나 그 바위와 싸우지 않고 돌아간 증거다.
이정근
"다투지 않고 묵묵히 흐르는 물은 선한 것이지.""내려가면서 지류와 만나면 점점 탁해지지 않은가?""그래도 선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네.""우리 인간도 만남이 확장되면 물처럼 탁해질까?""물은 물이고 사람은 사람이지.""그것은 또 무슨 말인가?""물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여러 지류와 만나면 더러워질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좋은 사람을 만나면 깨끗해지고 나쁜 사람을 만나면 더러워진다는 얘기지."짧은 대화였지만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겨누는 날카로 얘기였다. 개천을 건넌 조번과 한명회는 이조(吏曹) 뒷담을 돌아 인달방 조번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조번은 하사주는 내놓지도 않고 안평 얘기에 열을 올렸다.
"안평대군으로 말할 것 같으면 풍모가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대 인자한 큰 도량은 가히 성인군자라네.""그렇게 그릇이 큰가?""덕은 또 어떻구. 여러 사람에게 몸을 낮추어 마음을 얻으니 어찌 오랫동안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겠는가?""남의 밑에 있지 않으면?"한명회가 조번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곧 지엄한 자리에 오를걸세."겁 없는 소리다. 대군이 오를 지엄한 자리가 어디란 말인가? 그 자리가 옥좌라면 혀가 뽑히고 목이 달아날 소리다.
"자, 자, 우리끼리 너무 심각한 얘기 그만하구. 내가 좋은 것을 보여줄 게 있네."조번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하긴 피맛골에 있는 한명회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 목적이기도 했다. 조번은 안평대군이 준 선물을 보여주었다. 중국 유명 서예가의 글씨와 그림과 안평대군의 절친 안견의 그림도 있었다. 한명회가 놀란 척하자 조번이 신바람 났다.
"이건 안견의 그림인데 이 귀한 그림을 대군나리께서 날 주셨다네." 조번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좋겠네 자네는. 건 그렇고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인가?""삼정승은 말 할 것도 없고 육조 판서들이 모두 가담하고 있다네. 나는 한성부 판사와 함께 무기고의 병장기를 맡았네. 내 휘하에 별군(別軍)이 수백이요 장정들도 수백 명이라네."조번이 침을 튀겼다.
"능지기가 장군 되었군.""부러우면 진다네."한명회를 향하여 조소를 날리던 조번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자네도 나리를 한 번 뵈면 이러한 일을 맡길 줄 누가 아나? 이명민에게도 역부(役夫) 1천명을 맡겼다네."이명민은 창덕궁 중수공사를 맡고 있는 선공부정이다.
"나도 좀 끼어줄 수 있겠나?"한명회가 은근짜를 놓았다.
"여부 있겠나.""판사는 누구인가?""윤처공이네.""대신은""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공(三公)과 우참찬, 이조판서, 병조판서가 모두 안평대군과 친하게 지내어 정이 골육(骨肉)과 같아 생사를 같이 할 것이라 들었네.""큰일을 치러도 남음이 있겠군.""며칠 지나지 않아 큰 일이 터질 것이네. 그때 그대는 실컷 구경이나 하시게."조번이 의기양양하게 '큰일'이라는 것에 힘주어 말했다.
"여보게 조지기! 술고파 술청에서 술 마시던 사람 데려 와가지고 술도 안 주면서 이게 무슨 경우인가? 난 가야겠네."한명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참, 대군 하사주 맛보여준다고 해놓구선 내 정신 좀 봐."조번이 호들갑을 떨었다.
"난 가겠네."한명회가 두 손을 털었다. 조번이 대군 하사주를 맛보이려고 데려온 것도 아니고 한명회 역시, 술이 그리워서 온 것이 아니었다. 미련 없이 헤어졌다. 바로 그 시각. 이현로가 명례궁을 찾아왔다.
"네가 웬일이냐? 안평이 염탐이라도 보내던가?"수양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요. 소인이 개인적으로 나리께 문후 여쭈러 왔습니다."이현로가 두 손을 비볐다.
"일없다."수양이 한마디로 잘랐다.
"먼 길 다녀오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으셨습니까?""너의 인사는 받고 싶지 않다. 포박하여 헌부에 보내기 전에 냉큼 나가거라."수양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하인을 불러 사헌부로 묶어 보낼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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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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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사는 받고 싶지 않다, 냉큼 나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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