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의 노예들. 군사들의 포위 속에 휴식을 취하고 있다.
MBC
전쟁포로가 된 점령지 주민들을 사비 서쪽과 평양으로 옮긴 것은 해당 지역의 농경지를 경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비 인근 및 평양의 노동력 부족 사태를 해소하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노예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전쟁의 동기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농경지 확보를 목표로 벌인 전쟁이었다면 점령지 주민들의 주거지를 그대로 인정했겠지만, 위의 사례에서는 노동력 확보라는 목표가 더 중요했기에 주민들의 주거지를 옮긴 것이다.
전쟁의 목표가 농경지 확보냐 노동력 확보냐는, 그때그때의 경제사정에 따라 바뀌었다. 농경지가 부족한 경우에는, 적국 영토를 점령한 뒤 그곳 주민들에게 경작권을 인정했다. 노동력이 부족한 경우에는, 적지를 빼앗은 뒤 그곳 주민들만 빼내 오기도 했다. 인구 밀도가 낮았던 고대에는 영토를 빼앗는 것보다는 노동력을 빼앗아 자국 농토에 배치하는 게 훨씬 더 유리했다.
오늘날에는 국가마다 공업기술 수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외국 노동자들을 무분별하게 수용할 수 없다. 하지만 농업이 지배적이었던 고대에는 일국의 농민이 외국의 농토를 경작하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왕국들은 외국 노동력을 빼앗아 자국 농토에 배치하기 위해 전쟁을 자주 벌였던 것이다.
점령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전쟁 포로들은 일종의 노예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조선시대 노비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노예와 노비가 같은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인격권이 인정되지 않고 물건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었다.
또 노예에게는 생산수단(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았고 노비에게는 그것이 '원칙상'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이 둘은 유사한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 내 한국학의 대표주자인 제임스 팔레(2006년 작고)가 '노비'를 노예(slave)로 번역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노예'하면 쇠사슬에 묶인 존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수많은 사람들을 쇠사슬로 묶은 상태에서 이들을 오랫동안 노동력으로 활용하기란 쉽지 않다.
노예 착취를 보장한 것은 쇠사슬이 아니라 국가권력이었다. 노예(노비) 제도를 인정해 주고 주인과 노예의 차별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며 노예의 도망이나 항거를 경찰력 혹은 군사력으로 제어해 주는 국가권력이야말로 노예제도를 유지한 진정한 의미의 '쇠사슬'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초반에 포르투갈·스페인·영국·프랑스·독일에서는 아프리카 노예를 둔다는 것이 상당한 자랑거리였다. 이 시기에는 아프리카 노예가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정도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특히 포르투갈에 끌려간 아프리카 노예들 중에는 주인의 배려 하에 대학에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노예를 구속한 '쇠사슬'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지 않고는 이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