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의 장남인 김승규(허정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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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이 한밤중에 찾아왔다는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김종서는 바짝 긴장했다. 그는 수양대군의 수하가 적다는 보고를 받은 뒤에야 안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칼자루에서 칼을 뽑아 벽에 걸어두고 나왔다. 김종서가 연락을 받고도 한참만에야 나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경계했기에, 몇 걸음 물러서서 편지를 펴보았던 것이다.
김종서는 밤중이라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서, 고개를 숙여 달빛에 비춰 가며 편지를 읽었다. 그의 시선이 편지에 고정되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수양대군의 수하가 김종서에게 쇠몽둥이를 내리쳤다.
불의의 공격에 아버지가 쓰러지자, 놀란 김승규는 얼른 달려들어 아버지의 몸에 엎드렸다. 그러자 수양대군의 또 다른 수하가 칼을 뽑아 김승규에게 내리쳤다. 이렇게 김승규는 아버지를 자기 몸으로 감싼 상태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을 마친 수양대군은 말에 올라타 유유히 돌아갔다.
수양대군 측은 곧바로 김종서의 다른 아들들을 찾아 나섰다. 김종서가 먼저 내란을 일으켰다고 선언한 수양대군 측은, 김종서의 아들들 역시 역모에 가담했다면서 그들에 대한 체포작업에 돌입했다.
김종서 손자들까지 겨냥한 수양대군의 칼날6일 만인 음력 10월 16일(11.16), 수양대군 측은 차남 김승벽의 소재를 파악했다. 제보를 받은 수양대군 측은 경기·충청 지역을 전전하던 김승벽을 잡아들였다. 수양대군 측은 증거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에게 내란 공모죄를 씌워 사형에 처했다.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사형이 집행됐다는 점은 단종 1년 11월 1일자(1453.11.30) <단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록에 실린 구형 의견은 이렇다. "김종서는 주범입니다. 그가 거병하고자 했다면, 김승벽도 필시 추종했을 것입니다. 이를 가벼이 다룰 수 없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정황 증거만으로 사형이 구형됐고, 힘없는 단종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승유를 제외한 두 명의 적자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서자인 석대·목대의 경우는 그들이 계유정난 때 사망했다는 점만 알 수 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수양대군의 칼날은 김종서의 아들들뿐만 아니라 손자들까지 겨냥했다. 김승규의 세 아들 중 2명, 김승벽의 네 아들 중 3명이 계유정난으로 목숨을 잃었다. 유독 김승유 부자만큼은 화를 모면했다.
이처럼 수양대군은 김종서 집안을 순식간에 짓밟아 놓았다. 철천지원수란 표현이 이렇게 적합한 경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집안의 생존자들이 수양대군에게 얼마나 큰 분노를 품고 여생을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과연 누가 철천지 원수와 결혼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