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터김종서의 옛 집터에는 농업박물관이 들어서 있다(좌) 표지석(우)
이정근
김종서 집 앞에 다다른 수양, "좌상을 뵈러 왔네"권람을 앞세운 수양이 김종서의 집 동구에 이르렀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 고래등 같은 저택이 시야에 들어왔다. 길 건너 경기감영보다도 규모가 커보였다. 변방을 평정한 김종서는 함길도 관찰사시절부터 북방 왕래가 잦았다. 때문에 도성 안에 집을 갖는 것보다 돈의문 밖에 집을 장만하는 것이 편리하여 고마동에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집 가까이 다가가자 솟을대문 앞에 무장을 갖춘 30여 명의 무사가 서성이고 있었다. 마구간을 나온 여러 필의 말도 보였다. 여차하면 뛸 수 있는 기병이다. 본채 바깥에 자리 잡은 김종서의 맏아들 김승규의 집 앞에도 군장을 갖춘 무사 세 사람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누구냐?"수양이 김종서의 집 앞에 이르자 무사들이 그를 에워쌌다.
"무엄하구나. 이분은 수양대군 나리이시다. 어서 길을 비켜라."권람의 목소리에 놀란 무사들이 길을 열었다.
"어서오시지요. 대군 나으리."집 앞에서 윤광은, 신사면과 담소를 나누던 김승규가 정중하게 수양을 맞이했다.
"좌상 영감님을 뵈러 왔네. 어서 고하시게."사헌부 지평과 형조정랑을 지내고 정삼품 병조참의에 있는 당상관이지만 수양에게는 하대의 대상이었다.
"수양대군이 아버님을 뵙자고 합니다.""찾아온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할 것이고 많으면 쏘라 할 것이다."12척 담 뒤에는 시위를 겨냥한 궁사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적습니다."담 위에서 수양 일행의 행동을 살피던 가노가 승규를 뒤따라와 아뢰었다.
"알았다. 의관을 정제하고 나갈테니 잘 모시도록 하라."가노의 보고에 안심이 된 듯 김종서가 뽑아 든 칼을 벽에 걸어 놓고 나왔다.
"안으로 드시지요."김종서가 예를 다해 맞이했다.
"드릴 청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만 해가 저물어 결례가 될까봐 저어됩니다."수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김종서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나 수양이 사양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시지요."마지못해 김종서가 뜰 앞으로 나왔다. 정조(停潮)와도 같은 정막이 흘렀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할 때 바닷물이 멈춘 듯이 보이지만 수면아래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다. 썰물은 밀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밀물은 쓸리지 않으려고 안감 힘을 쓴다. 하지만 썰물 때가 되면 밀물은 밀리고 밀물 때가 되면 썰물은 쓸린다. 순리다.
"사모뿔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뜻밖이었다. 허를 찔린 것이다. 김종서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활을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시위가 끊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김종서가 수양의 사모를 쳐다보았다. 한쪽 뿔이 없다. 난감한 일이지만 공연한 청도 아니다. 수양의 사모뿔은 말 타고 달려오면서 떨어져버린 것이다.
사모뿔은 사모 좌우에 달린 잠자리 날개 모양의 뿔이다. 그것이 없는 사모는 쭉지 빠진 장끼처럼 몰골이 사납다. 김종서가 창황히 사모뿔을 빼어 주었다. 굴욕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그가 아니다.
"사모엔 관대가 제격인데 갑주는 썩 어울리지 않습니다."회심의 일격이다. 역시 노회한 재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