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한양성곽의 성문과 대궐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던 종루. 개국공신 정도전이 유교의 덕목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서대문을 돈의문, 종루를 보신각이라 명명했다 .
이정근
인경 소리에 개의치 말라는 주문이다. 도성은 야간 통행금지가 엄격했다. 저녁 2경(二更-21시)에 종각의 종이 28번 울리면 한양 성곽 4대문과 4소문이 닫혔다.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파루는 새벽 5경(五更-4시)에 33번 종을 치는 것으로 알렸다. 공물이나 세곡을 실은 수레와 임금이 국가의 위난 시에 대신을 긴급히 호출하는 신표(信標)를 소지한 자 이외에는 어떠한 자도 통행이 금지되었다. 이를 담당하는 관아가 순청(巡廳)이다.
돈의문 주위가 적막에 쌓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문이다. 한양을 에워싼 성곽과 함께 등장한 돈의문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좌에 오른 이방원을 등에 업고 권세를 부리던 이숙번에 의해 수난을 겪었다. 자신의 집근처에 수레와 통행인이 많아 시끄럽다며 옮겨가라는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돈의문, 그 문밖에 김종서가 살고 있었다도리 없이 새문을 짓고 이사했다. 문패도 서전문으로 갈아달았다. 이숙번이 몰락하자 세종은 새문을 헐고 원래 위치에 다시 지어 돈의문으로 환원하라 명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돈의문에서 황토현에 이르는 길을 새문안길이라 불렀다.
말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세종의 장인 심온은 중국 사신길에 돈의문에서 권력을 쫓는 문무 실력자들의 대대적인 환송을 받아 이방원의 노여움을 샀다. 귀국 길 압록강에서 붙잡혀와 사약을 받게 된 이유다. 사연도 많고 곡절도 많은 돈의문이지만 중국으로 통하는 요충이기에 도성의 서대문으로서의 위상에는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