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묘지에 안장된 '쿠데타 주역'대전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8일 안현태 씨 묘소 앞에서 이장 촉구 집회를 열고 있다
오마이뉴스 장재완
며칠 전, 프랑스의 나치 숙청 관련 글을 하나 쓰면서 나치협력자 재판을 총지휘한 드골 장군에 관한 글 한 편을 읽게 됐습니다. 필자는 여러 매체에서 오랫동안 파리특파원을 지낸 원로 언론인 주섭일(74)씨. 주씨는 파리특파원 시절인 1979년 드골 장군의 묘소와 고택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2008년 드골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2009년 첫 방문 이후 30년 만에 그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는 글 첫머리에서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학자 모리스 아귀롱의 책 얘기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주씨에 따르면, 좌파사학자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아귀롱은 우파인 드골 장군에 대해서는 추호의 관심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촌구석 공동묘지 한구석에 '서민과 똑같은 높이와 넓이'의 드골 묘지를 방문한 후 충격을 받고서 <드골, 역사, 상징, 신비>라는 책을 썼다고 합니다. 물론 이 책에서 아귀롱은 드골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담았구요.
드골의 묘소는 30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외국인이 혼자 찾아가기 힘든 촌구석에 있습니다. 드골의 묘소가 있는 '콜롱베 레 드제그리즈' 마을은 파리에서 250km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자가용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그런 두메산골이라고 합니다. 파리발 급행열차로 쇼몽시에 내려 택시를 타고 20분 달려서 콜롱베 마을에 도착한 주씨는 택시기사에게 "셔틀버스라도 마련해야지 드골과 같은 위인 기념관에 버스도 없다니 말이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택시기사 왈, "드골은 위대하지만 그도 한 명의 시민일 뿐"이라고 답하더라는 겁니다.
흔히 드골은 '대통령'보다는 '장군'으로 불립니다. 그는 1912년 생시르 사관학교를 나와 제1차 세계대전 때 육군 중위로 참가해 최고훈장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제5군단 소속 기갑여단을 이끌고 참전한 드골은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자유프랑스'를 세웠습니다. 이후 연합군의 일원으로 나치독일과 싸우는 한편 프랑스 국내에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나치와의 내전을 총지휘하기도 했습니다. 1944년 파리 해방과 함께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한 드골은 나치협력자 청산에 진력하였으며, 이후 오늘의 프랑스를 만드는 데 기틀을 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