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 상상도. 출처는 중학교 <국사>.
교육과학기술부
사실,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 역시 암묵적으로 고구려를 지원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 따르면 무왕이 수나라를 돕겠다고 나선 시점에 신라 진평왕도 동일한 방법으로 수나라에 접근했다. 이는 신라 역시 수나라를 도울 것처럼 행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발을 뺐다.
김춘추의 사대외교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신라는 언제나 동족을 배신하고 외세를 지원한 것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에 신라는 외세로부터 실리만 챙겼을 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김춘추의 사대외교를 빌미로 오늘날의 대미 사대외교를 합리화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춘추는 신라 역사의 한 부분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신라왕들의 기본 관심은 무역흑자와 안보뿐이었다. <수서>에 나타난 백제 무왕의 태도는 신라왕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드라마 <계백>에서, 백제 귀족세력은 무왕이 중국에 끌려 다닌다고 비판하면서 그를 사대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있다. 하지만, <수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무왕은 한편으로는 중국을 돕는 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역흑자를 늘리고 군사정보를 빼내는 실리정책을 추구했다.
중국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좀더 당당하게 살 수 없었느냐고 주문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 백제의 경제사정이나 대외관계를 볼 때 그것은 지나친 요구다. 무왕으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도 무왕을 포함한 백제·신라의 왕들이 일부 역사소설이나 사극에서 사대주의자로 묘사되는 것은, 작가들이 사료에 나오는 조공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공이 일방적인 헌납이 아니라 반대급부를 전제로 한 물물교환이었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료에 나오는 조공 기록만 보고 곧바로 사대주의를 떠올리는 것이다.
중국이 자랑하던 조공, 관계 전제로 한 '물물교환'중국 사료에서는 외국이 자국에 물건을 보내주는 측면만 부각시켰지, 자국이 외국에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답례품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잘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사료만 놓고 볼 경우에는, 이 세상에 중국만큼 위대한 나라는 없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한국 사료인 <삼국사기>마저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이 책의 많은 부분이 중국 사료를 그대로 베낀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의 중국인들은 로마교황청도 중국에 조공을 하고 대영제국도 중국에 조공을 한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대가관계를 전제로 한 물물교환이었다. 그런 이익이 없었다면, 저 멀리 사는 영국인들이 배에 물건을 가득 싣고 그처럼 열심히 중국을 들락거린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과 중국 간의 조공도 실은 그런 것이었다.
<삼국사기>의 조공 기록에 담긴 중국적 세계관을 배제하고 좀더 객관적으로 역사를 관찰할 경우, 우리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경우에 따라서는 신라도 중국에 대해 실리 위주의 정책을 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양제를 돕는 척하면서 실은 무역흑자와 군사정보만 '달랑' 챙기는 동시에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음으로 지원한 무왕의 전략도 그 같은 실리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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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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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 살수대첩 승리, 백제 무왕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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