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컨텐츠 기획자이며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인 탁현민씨.
유성호
- 탁현민씨는 본인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생각해요?"아티스트요. 제가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에서 문화콘텐츠를 전공했는데, 사람들은 간혹 제 일을 공연으로 한정할 때가 있어요. 저는 사회에 요구되는 문화콘텐츠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공연, 영상, 이벤트, 책, 강의 등등 나를 모티브로 해서 표현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죠.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학문간 교류, 통섭(通涉)을 강조했었는데 문화콘텐츠 영역이야말로 통섭이 필요한 것 같아요. 장르와 경계를 허물려고 노력하는 것. 실은 제 직업을 다 설명해서 명함에 넣어보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명함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모두 안 들어가더라고요. A4용지 한 장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아예 명함을 없앴죠. 하하."
- 첫 직장이 참여연대인데, 왜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려고 했나요? "때는 1997년이었고, 저는 대학 3학년 2학기였어요. 학점이 많이 모자랐는데 조희연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님이 참여연대에서 인턴십을 하면 6학점을 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시민단체에 첫 발을 딛게 됐어요. 처음 한 일은 <개혁통신>이라고 A4용지 몇쪽 분량의 글을 써서 언론 등 각계에 보내는 일이었어요. 원래는 <개혁통신>을 만드는 게 일이었지만 실제로는 전화기 고치고 형광등 갈고 컴퓨터 고치고 그런 것이었죠.(웃음)"
- 참여연대 일은 재미있었나요?"재미있다기보다는 일단 학점이 급했으니까. 제일 서글펐던 건 어떤 자원활동가의 책상 위에 걸린 형광등이 고장 났다고 고치라고 해서 책상 위에 올라섰는데, 그 자원활동가가 째려보며 '아저씨! 있다가 하면 안 돼요?' 했을 때예요. (모두 웃음) 그땐 또 참여연대에 온갖 사연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많이 오셨어요. '내 귀의 도청장치'부터 시작해서 유명인사까지 한국사회의 온갖 일들이 집대성 되는 현장 같았죠.
제 자리가 박원순 변호사(당시 사무처장) 맞은편이었는데, 그분은 누가 자신을 찾아오면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었어요. 꼭 활동가 한 명과 연결을 해서 저 분의 이야기를 들어드리라고 했지요. 제가 자주 걸렸어요. 박 변호사님이 연결해준 분이니까 이야기를 잘 들어드려야지 하곤 노트와 펜을 챙겨서 몇 시간씩 메모하며 듣다보면 결론은 '내 귀의 도청장치'. (모두 웃음) 그런 해프닝이 참 많았어요."
- 참여연대 문화사업국에선 주로 어떤 일을 했어요?"음…. 주로 앰프 설치, 앰프 철수. 미술계 선생님들의 작품 받아오기. 정부 돈, 기업 돈 받지 않고 오로지 시민의 힘으로 운영하는 단체가 많지 않던 시절인데요. 그때 참여연대는 정부 돈도 기업 돈도 받지 않고 오로지 시민의 돈으로 운영했어요. 그러니까 늘 돈이 없었어요. 날마다 사람들에게 손 벌리기도 그렇고 해서 고안해낸 게 문화사업이었어요. 늘 그림을 팔고, 도자기를 팔고, 액자를 팔고 그랬지요. 그러다 제가 처음 해본 게 공연사업이었어요. 오로지 공연수익만으로 성공한 사업을 해본 거지요. 그때 제 월급이 60만 원이었죠."
"대중과의 접점 찾으며 하게 된 공연... 첫 무대에 서준 자우림과 이은미"- 첫 무대에 누가 섰나요?"자우림과 이은미씨였어요. 공연장에 오신 아주머니들 중엔 김윤아씨가 '자우림'인 줄 알고 환호하고 그랬죠. 예술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했는데 제목이 '말 많은 세상에 던진다' 였어요. 지금은 그 제목이 촌스럽지만 그땐 그런 게 유행이었어요. 그 공연 시작할 때 활동가들 사이에선 온갖 볼멘소리가 다 나왔죠. 말 많은 세상에 뭘 던지느냐, 공연히 일 벌려 사고치지 말아라 등등. 그런데 공연이 딱 끝났는데 오로지 공연수입만으로 5000만 원을 번 거예요. 모두 놀랐지요. 제가 느끼기엔 그때부터 사람들이 절 달리 보기 시작한 것 같아요. 큭큭."
- 공익문화센터는 어떻게 해서 시작하게 된 거예요?"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의 시민사회 최대 화두는 어떻게 하면 대중과 접점을 찾으면서 활동할 수 있을까 였지요. 그런데 언론이 정말 많이 도와줬어요. 문화도 수익이 된다는 콘셉트로 이상호 MBC 기자가 정말 많이 써줬어요. 공연이 시민단체의 수익이 된다고 판단하니까 그 뒤론 여성재단, 아름다운재단 등등에서 많이 했지요. 여성단체연합에선 문화기획집단을 만들기도 했고요."
- 공익문화의 새 장을 열었다, 이렇게 평가하세요?"음…. 제 한계를 많이 느꼈어요. 당시엔 대중음악에 대한 지식도 일천했고 가수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도 필요했어요. 김대중-노무현 민주정부 10년 시기였으니까 그땐 사회적 의미를 담은 공연이 별로 없기도 했고 또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지금처럼 굳이 사회적 의제랄까 그런 게 없었어요."
- 김제동, 윤도현씨와의 인연은 공익문화공연과 무관한가요?"제가 2002년부터 다음기획에서 일했어요. 그때 윤도현씨가 팍 떴죠. 제동씨는 윤도현씨의 대구공연장에서 처음 만났어요. 처음 봤는데 너무 웃긴 거예요. 처음 보자마다 함께 술 마시고 친해졌고 다음기획 공연을 함께 하게 됐지요. 2003년 윤도현씨가 KBS <러브레터>를 진행하면서 제동씨도 서울로 오게 된 거죠."
- 김제동씨는 사적으로 만나도 매우 웃긴 모양이죠?"사석에선 좀 무거운 편이에요. 방송에선 가볍지만 일상에선 묵직한 편입니다. 말도 가려서 하고 굉장히 예의를 따지고. 경상도 사나이라 그런가? (웃음) 저랑 달수로 6~7개월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꼭 형님이라고 불러서 저는 사실 좀 불편해요."
"직원들이 지분 나눠 갖는 회사... 망할 줄 알았는데 대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