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시위대가 벤 알리 전 대통령의 사진을 불태우고 있다. 시민들은 이날 구체제 인사들이 참여한 과도정부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다.
AP=연합뉴스
북아프리카가 뜨겁습니다. 날씨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언론들도 심심찮게 보도하고 있는 민주화 시위 때문입니다. 독재자들을 떨게 하고 있는 이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곳은 튀니지입니다. 2000여 년 전 로마와 자웅을 겨뤘던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을 배출한 땅이지요.
튀니지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민혁명(국화인 재스민에서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고 불리지요)을 통해 독재자를 몰아냈습니다. 그런데 공간도 다르고 51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음에도 '재스민 혁명'은 우리의 4월혁명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그럼,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의 전개 과정을 되짚으며 비교해볼까요?
[닮은 점 ①] 권력 연장에 눈먼 염치없는 독재자튀니지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합니다. 그 후 55년 동안 튀니지 대통령은 단 2명뿐이었습니다. 먼저 초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가 1987년까지 재임합니다. 그 뒤를 이은 지네 알 아비디네 벤 알리가 23년간 대통령 노릇을 합니다.
벤 알리는 종신 대통령이던 부르기바를 밀어낸 후 종신 대통령 제도를 없애겠다고 공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2002년 사실상 종신제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뜯어고칩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을 활용해 반대 세력을 힘으로 누르고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높은 물가와 부족한 일자리로 국민들이 고통받는 동안, 벤 알리의 친인척들은 은행, 언론사 등을 소유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습니다. 벤 알리의 부인은 '재스민 혁명'으로 튀니지를 떠날 때 금괴 1.5톤을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지요.
1948년부터 12년 동안 국가 최고 지도자였던 이승만 대통령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에 오래 머물기 위해 참 많은 일을 했습니다.
우의마의 사건 |
1956년 당시 81세이던 이승만 대통령은 속마음과 달리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본인은 원치 않지만 국민들이 원하니 대통령 선거에 다시 나선다는 모양새를 갖추고자 한 것이지요.
그러자 전국 곳곳에서 '각하의 출마를 원한다'는 관제 민의(民意) 시위가 벌어집니다.
그중 우마차조합이 우마차 800대를 끌고 나와 "소와 말까지 원한다"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했는데, 이로 인해 서울 거리가 동물들의 분뇨로 범벅이 돼 시민들이 코를 싸쥐고 다녔다고 합니다.
|
우선 헌법을 두 번 뜯어고칩니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정치파동(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연행해 이른바 국제공산당사건을 조작한 사건)을 일으켜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고친 발췌개헌입니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던 기존 헌법대로 하면 재선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벌인 일이었지요. 전선에서는 매일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후방에서는 피난민들이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때 대통령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유명한 1954년 사사오입 개헌입니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넣어 이승만이 계속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1956년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저세상으로 보내고, 부정선거(4할 사전 선거, 3인조·5인조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를 일삼은 것도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1956년 우의마의(牛意馬意) 사건처럼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집니다.
[닮은 점 ②] 평범한 젊은이의 죽음, 독재를 무너뜨리다상황이 이러하니 튀니지에도, 51년 전 한국에도 국민들의 원망이 쌓였습니다. 폭발을 위한 필요조건이 갖춰진 셈이지요. 그러나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는 거대한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합니다. '재스민 혁명'과 4월혁명에서 그 계기를 마련해준 건 평범한 젊은이의 죽음이었습니다.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중부의 시디 부지드에서 한 청년이 자기 몸에 불을 붙입니다. 무하마드 부아지지라는 26세의 이 청년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어서 과일 노점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이를 단속했고 그 과정에서 부아지지는 공개된 장소에서 따귀를 맞는 모욕을 당합니다. 부아지지는 이에 항의하고자 분신을 택합니다.
부아지지가 분신한 후 시디 부지드에서 시위가 벌어지지만, 이것이 독재자 벤 알리의 퇴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올해 1월 4일 부아지지가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위는 수도 튀니스를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됩니다. 그리고 부아지지가 분신한 후 딱 4주가 지난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은 튀니지에서 달아납니다.
4월혁명 때도 이와 비슷하게 상황이 전개됐습니다. 4월혁명은 1960년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벌인 시위로 시작됩니다. 이승만 정권이 야당 후보의 유세장에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일요일임에도 학생들을 등교시키고 노동자들을 전원 출근시키자, 고등학생들이 들고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선거 당일이던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때 경찰이 발포해 8명이 사망하고(9명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80여 명이 다칩니다.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은 이에 대해 "총은 쏘라('쓰라'로 들었다는 이도 있습니다)고 준 것이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점차 고조되던 독재 반대 시위에 기름을 부은 건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른 한 구의 시신이었습니다. 3월 15일 시위 때 행방불명됐던 17세 소년 김주열의 주검은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눈부터 뒤통수까지 관통당한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민간인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시신을 바다에 가라앉혀 사건을 은폐하려 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4월 19일 서울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와 4월 25일 교수단 시위는 정권을 더 곤혹스런 처지로 몰아넣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합니다.
부아지지와 김주열. 시대도, 처지도, 사망 경위도 달랐지만 평범했던 이 두 젊은이의 고귀한 희생으로 역사의 물길이 바뀌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