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남소연
"역사를 보면 복지는 특정 이념에서 나온 게 아니다. 보수정권이 체제방어를 위해 복지 정책을 내놓은 게 시작이었다."
한국에서 복지문제를 논의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김종인(71) 전 의원이다. 그는 1977년 박정희 정부시절 노동자 대상 의료보험 제도 도입의 산파였고, 도시지역 의료보험 실시로 전국민 의료보험이 된 1989년에 보건사회부장관을 맡아 의료보험이 뿌리내는 데도 기여했다. 1960년대말 70년대초에 독일(뮌스터대)에서 재정학과 분배론을 공부한 것이 의료보험 도입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이었다.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자신의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김 전 의원은 전 세계적으로 본격적인 복지제도의 효시는 1881년 독일(프러시아) 비스마르크의 의료보험제도였다고 말을 꺼냈다. 그는 당시 의료보험 도입배경을 "비스마르크는 극도로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맑시즘 선풍이 불면서 사회주의 정당의 정계 진출 조짐이 보이자 근로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의 상징어를 낳은 영국의 '베버리지 플랜'에 대해서도 그는 "대표적인 보수 정치인인 처칠 수상이 2차 세계대전 중(1942년)에 전쟁후 사회안정을 위해 만들고, 전후에 집권한 노동당이 이 계획을 실행했다"고 덧붙였다. 복지는 자비 개념이 아니라 사회의 내적 안보를 위해 보수파가 사회정책차원에서 도입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도 박정희 정부가 의료보험이나 연금제도(1973년 법제정, 시행은 1988년)를 만든 것에 대해 "성장하는 근로자들의 불만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역사적으로 복지는 보수의 어젠다였다'는 인식은 현재의 복지확대 흐름을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하는 한나라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그는 "복지 과잉이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줬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복지 때문에 망한 나라는 없다"며 "강자만 살아남는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한 재분배는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역할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가 불안해진다"고 강조했다.
"재벌 손자손녀는 오히려 공짜밥에 화 낼 것"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세금은 부자들에게도 모두 자녀공제를 하고 있는데 이건 왜 선별해서 하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에 대해서도 "양극화와 저출산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가 있고 국민들의 요구가 있는데 이걸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상식 이하"이라며 "젊은 정치인의 수준이 왜 그런지 안타깝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의 '무상' 표현에 대해서도 "세금을 내든 사회보험료를 내든 혜택 받는 사람이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무상복지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정치적 용어"라고 지적했다.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는 강조다.
"부유세 너무 나가... 세 신설보다 누진세율 높이는 게 낫다"
복지논쟁을 뒤이은 증세논쟁에 대해서는 "건국 이후 지금까지 정부재정 운영 스타일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며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시대 변화에 맞게 정부 재정기능을 확 바꿔야 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조세부담률은 19.3%(2009년 기준)이고 독일은 22.9%"라며 "근소한 차이가 있는데 독일은 그 조세부담률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공짜로 가르치는데, 우리는 그게 안 된다는 것은 재정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동영 민주당 의원의 부유세 신설주장에 대해서는 "너무 나갔는데, 정치인이 말을 뱉은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10조 원 정도가 목적이라면 새로운 세금을 신설하기보다 누진세율을 더 높이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인세와 소득세 감세를 없애고 비과세 감면을 줄이면 상당한 재원 충당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문답전문.
- '복지는 보수의 어젠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의미인가. "복지의 효시는 1881년 독일(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가 시작한 의료보험이다. 비스마르크는 극도로 보수적인 사람이었지만, 맑시즘(Marxism) 선풍이 불고 사회주의 정당의 정계 진출 조짐이 보이자 근로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변화하는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 체제방어 차원에서 의료보험과 연금제도 등을 도입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처칠이 전쟁 후 사회 안정을 위한 사회정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만든 게 '베버리지 플랜'이라는 사회보장 정책이었다. 그런데 처칠이 종전 후 선거에서 노동당에 패배해 실행 주체가 노동당이 됐을 뿐이다. 처칠이 선거에서 패하고 난 후 '영국 국민은 위대하다'고 했다. 자신이 베버리지 플랜을 시행하려고 했다면 보수당으로서의 한계가 있었을 텐데 노동당을 뽑아서 제대로 관철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뒤 처칠이 재집권해서 이를 이어갔다.
역사를 보면 복지라는 게 특정 이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보수 정권이 체제 안정을 위해 복지 정책을 내놓은 게 시작이었다. '소셜 시큐리티'라는 말이 처칠과 루즈벨트가 대서양의 선상에서 발표한 헌장에 등장한다. '시큐리티'가 안보라는 말이다. 앞으로 공산주의와 싸워야 하는데 평상시의 적은 국민 개인이 겪을 질병, 실업, 노령화다, 그래서 국민들이 이 문제로 생계 위협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게 기본 인식이었다. 결국 사회의 내적 안보를 위해 복지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지 자비 개념에서 시작한 게 아니다."
- 우리도 박정희 정권 때 의료보험 제도가 도입됐는데. "당시 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진행되던 때였다. 당시 경제 개발로 근로자수가 400만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에서, 한창 성장하는 이들의 불만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이 병에 걸리면 소득이 없어지고 한 가정이 생존의 위협에 처하게 되니 먼저 '근로자 의료보험'을 도입하자고 한 것이다. 그 때도 경제 관료들은 경제 성장에 반대된다고 모두 반대했다. 그때 못했으면 미국처럼 지금까지도 건강보험 제도가 도입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본질적으로 의료보험이나 연금 제도 등이 보수 정권 때 만들었다. 사실 진보정권들은 이미 만들어 놓은 틀을 변경하는 것 외에 새롭게 한 게 별로 없다."
"복지가 포퓰리즘? 한나라당 정치적 감각 없다" -한나라당은 복지확대 주장에 대해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라고 비판한다. "정치적으로 감각이 없다. 흔히 복지 과잉이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줬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 복지 때문에 망한 나라는 없다. 강자만 살아남는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기 위한 재분배는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역할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가 불안정해진다. 포퓰리즘도 민주적 선거를 치르는 나라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면 어떻게 선거를 치를 수 있나. 선거는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한 표씩 주어진다. 그런데 돈 없는 사람들 숫자가 항상 많다. 정치세력은 그들에게 혜택이 가는 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사회정책, 재분배 정책이다. 각 정당들은 유치한 논쟁 말고 각자 내놓을 상품을 만드는 데 신경 써야 한다. 유권자들이 보고 누가 나에게 가장 큰 혜택을 주는지 판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