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눈이 내린 23일 서울 세종로 세종대왕상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연합뉴스
불안스럽게 전철을 갈아타고 목적지를 향해 잘 가고 있는데 큰 아들 인효 녀석에게서 손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아빠, 지하철 잘 탔어?""어? 어.""또 거꾸로 탔지?" "어, 어... 나중에 얘기하자."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봐 가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하거나 말거나 인효 녀석의 혀 차는 소리가 손 전화를 타고 꽂혀옵니다.
"어이구, 참. 또 거꾸로 탔구만!""얏마, 여기 전철 안여, 인제 그만 끊자잉."3년 전, 7월 촛불문화제 이후 첫 한양길. 아침 6시 30분 마을버스를 타고 고흥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다시 순천 가는 버스를 이용해 순천역에서 영등포역까지 장장 7시간에 걸친 대 장정 끝에 출판사 '삶이 보이는 창'을 용케도 잘 찾아가 볼일 보기까지는 탄탄대로였습니다.
이번만큼은 헤매지 않으리라 굳은 결심으로 위풍당당하게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 하지만 한양 땅속 길은 촌놈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옛 명화극장 부근에 자리한 출판사에서 버스를 이용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어딘가의 지하철역'까지는 잘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어딘가의 역'에서 합정역까지 가기 위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안내판을 숙지하고 또 숙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철을 잡아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번만은 헤매지 않으려 했건만... 역시나 또 '거꾸로' 전철 안은 무척 더웠습니다. 전남 고흥과 서울은 영하 7도 이상의 기온 차가 납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올라와 전철을 타고 보니 등줄기로 땀이 배어 나왔습니다. 전철을 또다시 잘못 타게 되면 어떻게 할까, 그런 긴장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서울은 엄청 추울 것이라며 챙겨준 내복 때문이었을까. 전철 안은 점퍼를 벗어야 할 정도로 후끈거렸습니다. 고흥에서 서울로 올라올수록 기온은 영하로 뚝뚝 떨어졌지만 오히려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직행버스 안은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고 열차 안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점퍼를 벗고 목도리도 벗어야 했습니다. 군대에서도 입지 않았던 내복을 입은 것이 후회될 정도였습니다.
겨울을 느낄 수 없을 만치 따끈한 전철을 다시 반대 방향으로 갈아타고 합정역까지는 식은 죽 먹기로 되돌아 왔지만 어리숙한 촌놈의 갈팡질팡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멀리 비까번쩍한 하얏트 호텔을 눈앞에 두고 한남동 매봉산자락에서 군대생활의 반을 보냈고 거기다가 3년 넘게 잠실과 부암동에서 직장생활까지 했지만 촌놈에게 한양의 땅속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습니다.
합정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 디지털미디어시티 역에서 내려 다시 <오마이뉴스>가 있는 누리꿈스퀘어 건물까지가 최종 목적지. 합정역에서 내려 6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안내판을 쭉 따라나오다가 그만 밖으로 빠져나왔던 것입니다. 자동판매기를 통해 거스름돈 500원을 찾아 가라는 난생 처음 대하는 전철 카드를 다시 끊어야 했던 것입니다.
좌우지간 우여곡절 끝에 최종 목적지인 <오마이뉴스>에 용케도 찾아왔습니다. 출판부 기자들과 책 발간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오마이뉴스> 상근기자, 인턴기자, 지난해 상을 받은 시민기자들과 더불어 강화도에 자리한 <오마이스쿨>로 향했습니다. 강화도로 향하는 버스 역시 더웠습니다. 점퍼를 벗고 목도리를 벗었습니다.
<오마이스쿨>에 도착해 늦은 저녁을 먹고 생각지도 않은 강단에 섰습니다. 강의 요청이 들어왔을 때 그냥 방바닥 아니면 원탁에 빙 둘러 앉아 내가 살아가는 이력을 중심으로 <오마이스쿨>에 모인 사람들과 주고받는 식의 강의인 줄만 알고 '그러지요' 대답한 것인데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말 그대로 그냥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이라 여기고 아무런 강의 내용도 준비해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내 머리 속에 꽉 들어차 있는 골치 덩어리 핵발전소와 연관시켜 '서울은 고흥보다 덥다, 대도시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입을 떼놓고 더위 먹은 인간처럼 새 터에 정착할 때까지의 사는 얘기를 앞뒤 없이 횡설수설, 싱겁기 짝이 없는 낯 뜨거운 강의를 겨우 마쳤습니다.
서울이 고흥보다 춥다면서... 지하철은 왜 이리 더운겨다음날, 김종성 선생과 최병성 목사님의 준비된 알찬 강의를 듣고 나서 다들 눈밭으로 나와 신나게 축구공을 차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서울에서의 모든 볼일을 무사히 마치고 혼자 남았습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한 몇몇 사람들에게 짤막한 안부 인사를 나누고 곧장 가까운 전철역으로 향했습니다.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전철을 잡아탔습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전철 안은 답답했습니다. 어디로 갈까? 누구를 만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디야?""전철.""오늘은 어디 가는데?""어? 글쎄? 그냥 고속버스터미널로 갈까 싶어.""시은이네 아빠 연극보고 하루 이틀 더 있다 온다며?"아는 사람이 주연을 맡은 연극 구경도 하고 평소 보고 싶었던 얼굴들과 거나하게 술잔을 기울여가며 하루 이틀 더 머물고자 작정하고 올라온 한양길이었는데 생각 없이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공주로 내려갈까 싶네, 내복을 입어서 그런지 서울은 너무 답답해.""고흥은 엄청 추워졌어.""땔감이 좀 부족할 덴디?""부족하면 주워다가 때믄 되니까 걱정하지 마.""내가 갈 때까지만 그냥 기름 보일러 돌려.""방 한 칸만 쓰면 땔감이 얼마 안 들잖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