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저/김희정 역/안세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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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장이라는 것은 환상이라는 이야기이다. 자유시장처럼 보이는 시장이 있다면 이는 단지 그 시장을 지탱하고 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규제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22쪽)
그러니 장하준 교수의 말은 폴라니의 말을 다시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폴라니가 66년 전 <거대한 전환>에서 명언한 것을 장 교수는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정확히 재현하였다. 이것은 시장자본주의에 대한 폴라니의 비판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폴라니를 신자유주의의 원조 저격수라 부르고 싶다.
<거대한 전환>은 폴라니의 방대한 독서에 근거한 세기의 역작으로 평가된다. 이 책에는 역사, 철학, 인류학, 사회 이론 등 다양한 시각에 의한 경제분석이 동원된다. 이런 이유로 비전문가가 이 책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다거나 그의 정치·경제·철학을 알기 쉽게 정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폴라니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가면 폴라니가 말하는 시장자본주의 모순의 한 가운데에 다다를 수 있다.
<거대한 전환>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국제시스템)와 제3부(진행 중인 전환)는 제1차 대전, 대공황, 유럽대륙의 파시즘, 미국의 뉴딜과 소련의 첫 5년간의 경제개발 등의 사건을 낳았던 당시 세계정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서 폴라니는 하나의 큰 의문을 제기한다. 1815년부터 1914년에 이르기까지 100년간 번영을 누리던 유럽이 왜 갑자기 세계대전에 빠져들고 경제적 붕괴가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제2부가 말해 준다.
제2부는 이 책의 가장 중심 부분인데 여기에서 폴라니는 시장자유주의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되었는지를 밝히고 이러한 발전이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연원을 따진다. 그는 제1차 대전과 대공황으로 이어진 경제 질서의 붕괴는 모두가 시장자유주의를 지구적 차원에서 조직하려는 시도의 직접적 결과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파시즘의 탄생을 이러한 시장자유주의의 거대한 전환 끝에 나온 또 다른 전환의 한 과정으로 설명한다.
노동·토지·화폐의 상품화는 허구첫째,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가 노동·토지·화폐를 상품으로 보고 경제시스템을 만들려고 한 것이 완전히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제2부 제6장에 나오는데 폴라니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을 폴라니 주장의 핵심으로 인정한다. 우리는 경제학 공부를 하면서 임금은 노동에 대한 가격이고, 지대는 토지 사용의 가격이며, 이자는 화폐를 사용하는 가격이라고 배웠다. 바로 이것이 시장자본주의 곧 19세기 이후의 고전 경제학의 주요 내용이다.
따라서 시장자본주의에서는 이들 요소를 공장의 상품과 같이 취급해야 하며 그 가격형성과 수요공급은 시장의 자기조절 기능에 맡겨야 한다는 믿음을 강조한다. 이 말은 이들 영역에 국가는 가급적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폴라니는 노동·토지·화폐는 근본적으로는 상품이 아니며, 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상품에 대한 경험적 정의에 따르면 이 세 가지는 상품이 될 수 없다. 노동이란 인간 활동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 토지란 단지 자연의 다른 이름일 뿐인데, 자연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화폐는 그저 구매력의 징표일 뿐이며, 구매력이란 은행업이나 국가 금융 메커니즘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노동토지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이다." (243쪽)폴라니는 본래부터 상품이 될 수 없는 노동·토지·화폐에 대하여 시장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이들 요소에 시장자본주의를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파국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에서 고용의 자유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고용의 자유는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토지에 대하여 그 소유와 사용에 대하여 규제를 풀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순간 전국의 땅은 투기 열풍 속에 들어갈 것이며 우리의 소중한 자연환경은 그날로 망가지게 되어 있다.
폴라니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운명이 순전히 시장 메커니즘 하나에 좌우된다면 결국 사회는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자연과 인간을 전적으로 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는 물건처럼 다루지 말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경제적 주장이 아니라 도덕적 주장이다.
더욱 이 말은 경제에서 국가가 차지하는 국가의 역할을 다하라는 주장이기도 하다. 국가는 그 권력을 사용하여 화폐의 공급과 신용의 공급을 조절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구제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나아가 토지의 경우 농업생산을 위해 농지를 보호하고 각종 환경규제를 해야 한다. 결코 국가는 이들 생산요소의 운명에 대하여 팔짱을 끼고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실체를 발견하다둘째, 폴라니의 사회사상이다. 그는 이 책에서 사회의 실체를 발견하였다고 한다(제10장). 이것은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폴라니의 사회사상 중 핵심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말은 경제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기본 시각을 의미한다. 폴라니는 로버트 오웬의 사회주의에서 사회의 실체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사회는 국가 자체도 아니고 시장경제 그것도 아니라고 한다.
시장자본주의에서는 사회가 시장논리(경제)에 의해 종속(지배)된다고 본다. 그러나 폴라니는 경제와 사회의 관계는 오히려 정반대의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경제는 정치, 종교, 사회관계 밖으로 빠져나와 그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정상적 패턴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회를 시장(경제)에 묻어 버리는 행위는 모두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만 낳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 대단히 도덕적인 주장이다. 사회는 경제보다 훨씬 심오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 인간의 자유와 가치, 그리고 이상이 잠재해 있는 실체이다. 따라서 경제는 바로 이러한 사회의 실체에 복무하는 기능을 담당해야지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사회를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면 이 사회가 시장경제의 부수물이 되지 않도록 사회에 의한 경제 통제를 허용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폴라니의 비전, 자유로운 사회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