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농사 사부님. 평생 농사일로 살아오시다가 지난 여름 세상을 떠나신 유순종 할아버지. 뒤에 보이는 임봉순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송성영
어떤 할머니는 지나가면서 눈을 흘기기도 했습니다.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이삿짐에 땔나무까지 실어가니 참 지독하다 싶었겠지요. 하지만 그 할머니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충남 공주에서 전남 고흥까지 5톤 트럭의 운송비가 땔나무 값보다 더 비싸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비용을 떠나서 할아버지와 맺은 13년간의 정을 옮겨 실었던 것입니다. 그 땔감은 한겨울 이삿짐을 꾸렸던 우리 식구에게 낯선 타지에서 따뜻하게 보내라는 유씨 할아버지의 속 깊은 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삿짐을 꾸릴 때 이제 떠나면 언제 보는가 싶어 아내와 두 손을 꼬옥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유씨 할아버지. 그 땔감은 유씨 할아버지가 우리 식구에게 내준 마지막 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식구가 전남 고흥으로 이사 와 한창 자리 잡을 무렵인 지난 여름, 손이 갈라 터지고 짓뭉개지도록 평생 머슴처럼 농사일을 하셨던 유씨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굳이 나무를 베지 않아도 찾아드는 땔감들그렇게 유씨 할아버지의 땔감 덕분에 낯선 고흥땅에서의 첫 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땔감이 다 떨어질 무렵, 엔진 톱을 들고 나무를 베기 위해 산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집을 짓고 나서 빈손이 되다시피하여 기름 값조차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을 지피는 것보다는 더 유용한 나무, 바람을 막아주고 맑은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푸른 빛깔에 고운 단풍까지 아낌없이 내주는 나무에 대한 생각에 잔가지 하나 베지 못하고 그냥 내려와야 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땔감이 되면 우리 식구만을 위한 것이지만 살아 있는 나무는 우리 식구들이 평생 누리게 될 것이고 또한 우리 집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고흥이 따뜻한 남녘이다 보니 낮에는 불을 넣지 않고 지낼 수 있어 많은 땔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땔감이 필요했습니다. 길거리나 바다 산책길에 주워온 땔감으로 겨우 장작 보일러를 돌리고 있던 어느날, 새 터의 이전 땅 주인이었던 서해종씨가 밭을 정리하면서 베어 놓은 굵직한 아카시아 나무를 구할 수 있었고 그 땔나무로 일 주일쯤 버티고 나자 새 터를 소개해줬던 서군섭씨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 농장에 참나무 베놓은 게 있으니께, 갔다 때소."농장을 준비하면서 베어 놓은 굵직 굵직한 참나무를 가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맙게도 자신이 몰고 다니는 트럭으로 그 나무들을 실어다 주시기까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