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순감옥에서 처형된 사형수들의 시신은 나무통에 담겨져 이곳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안 의사는 특별히 송판관에 담겨 매장했다고 한다.
박도
안중근 행장 (22) 검찰 신문1909년 11월 1일 하얼빈을 출발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정대호, 김성옥, 김려수, 김형재, 탁공규 등은 일본 헌병 12명의 삼엄한 감시 속에 1909년 11월 3일 아침 뤼순 역에 도착했다. 곧장 뤼순감옥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안중근은 특별감시대상 인물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로부터 감옥에 갇힌 뒤로 날마다 차츰 가까이 지내게 되는 중에 전옥(典獄, 교도소장)과 경수계장과 일반관리들이 나를 후대하므로 마음속으로 이것이 참말인가 꿈인가를 의심했다.
- <안응칠 역사> 183쪽
안중근은 제2회 신문에 앞서 1909년 11월 6일 <안응칠 소회>를 작성하여 이토의 죄악상 15개조와 함께 서면으로 검찰에 제출했다.
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라.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이 시대를 의례히 문명한 시대라 일컫지마는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의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이것을 가히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 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다.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끊일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냐.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 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1909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 뤼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 <대한의 영웅 안중근 의사> 67쪽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1909년 11월 14일 제2회 신문을 받았다.
제2회 신문조서 초(抄)문: 피고에게는 처가 있고 그는 김홍섭의 딸인가?
답: 그렇다.
문: 피고에게는 두 살 다섯 살 난 자식이 있는가?
답: 다섯 살 난 자식은 있어도 나는 3년 전에 집을 나왔으니까 두 살 난 아이는 모른다.
문: 피고 처자는 지금 하얼빈에 있는데, 알고 있는가?
답: 모른다.
문: 피고 신상은 두 아우로부터 판명되고 있으니까 숨김없이 말하라.
답: 거짓말은 결코 하지 않는다.
문: 하얼빈에서 신문하였을 때 피고는 처자가 없다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답: 나는 동양을 위하여 3년 전부터 진력(盡力, 있는 힘을 다함)하고 있으니까 분명히 처자는 없으므로 없다고 말하였는데 실제로 처자가 있다.
문: 피고는 사서오경(四書五經) 및 통감(通鑑)도 읽었다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답: 경서(經書)를 다소 읽고 또 통감도 읽었다.
문: 그밖에는 어떠한 책을 읽었는가?
답: 만국역사(萬國歷史, 세계사), 또는 조선역사를 읽었다.
……………………
문: 피고 아우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안창호(安昌浩)라는 자를 안다는데 그런가?
답: 그분과는 두세 번 만났을 뿐 친밀하지는 않다.
문: 그간 최재형(崔在亨), 최봉준(崔鳳俊),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전명운(田明雲), 이춘삼(李春三), 유인석(柳麟錫), 홍범도(洪範圖) 및 차도선(車道善) 등을 만난 일은 없는가?
답: 홍범도만 만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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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체포되었을 때 이토 공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피고는 이토를 죽었으므로 신(神)에게 감사한다 하고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는가?
답: 그렇다. 그 뒤 나는 대한만세를 불렀다.
피고인 안응칠
위 읽어 들려준 바, 상위(相違) 없는 것을 승인하고 자서(自署)하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이날 제2회 신문에 이어 1909년 11월 15일 제3회 신문이 이어지고 11월 16일 제4회 신문이, 11월 18일 제5회 신문이 이어지다. 이날은 안응칠 우연준(우덕순) 유동하 3인의 대질신문이었다. 다음날인 11월 19일 안중근의 두 동생 공근, 정근도 뤼순으로 불려와 참고인 신문을 받았다.
이어 11월 26일 제7회 신문, 12월 20일 제8회, 12월 21일 제9회, 12월 22일 제10회, 이듬해인 1910년 1월 26일 11회 마지막 신문이 있었다. 초기의 신문과는 달리 12월 20일 제8회 신문부터 마조부치 검찰관의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그동안 호의적이고 정중하던 신문태도가 강압적으로 돌변했다.
11월쯤 되어서다. 나의 친동생 정근과 공근이 진남포로부터 이곳에 와 반가이 만나 면회했는데 서로 작별한지 3년 만에 처음 보는 것이라 생시인지 꿈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로부터 항상 4~5일 만에 혹은 10여 일 만에 차례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인 변호사를 청해 올 일과 천주교 신부를 청해다가 성사(聖事)를 받을 일들을 부탁하기도 했다.
8회 신문부터 검찰관의 태도가 돌변한 것은, 당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안중근의 의거 정당성과 재판관할권의 애매한 입장, 그리고 안중근의 돈독한 신앙심 등에 대한 배려로 형량을 무기징역 정도로 고려했으나 일본 정부 내의 강경파가 서둘러 "극형에 처하라"는 밀명(密命)을 보내옴에 따라 관동도독부 법원의 태도가 표변치 않을 수 없었다.
안중근과 같이 연행된 9인 가운데 1909년 12월 24일 김형재, 김려수, 김성옥, 탁공규는 무혐의로 석방되고 안중근의 처자를 하얼빈까지 데려온 정대호는 다음해 2월 1일 풀려났으며 안중근 외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3인만 공소 제기되었다
공판1910년 1월 중순, 뤼순지방법원은 안중근에 대한 첫 공판 날짜를 2월 7일로 정하고 장소는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제1호 법정으로 결정하였다. 관동도독부 법원의 재판제도는 지방법원에서는 판사가 단독으로 심리 재판하는 2심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1심 이전에 예심을 거치도록 돼 있으나 안중근의 경우 중대한 사건임에도 본국 정부의 지령에 따라 곧바로 1심 공판에 부쳐졌다.
1910년 2월 1일,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好雄) 검찰관은 안중근은 살인, 우덕순과 조도선은 살인예비, 유동하는 살인방조의 죄명으로 예심을 생략한 채 지방법원에 공판을 청구했고, 지방법원은 속전속결로 이날 재판부를 구성하여 2월 7일 제1차 공판을 개정키로 최종 확인하였다.
재판부는 주임재판장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장 미나베 (眞鍋十藏), 담당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 관선변호사 미즈노 기치타로 (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正治) 등 전원 일본인으로 결정되었다.
이 무렵 블라디보스토크의 대동공보사와 홍콩의 동포들이 안중근 변호를 위해 성금을 모아 러시아인 변호사 미하일로프(대동공보 전임사장)와 홍콩 거주 영국인 변호사 더글라스, 그리고 서울 유지들과 안중근 어머니가 보낸 안병찬(安秉瓚) 변호사 등이 변호사신고서(변호사 선임계)를 냈으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는 이를 허가치 않았다.
1910년 2월 7일, 첫 공판이 열렸다. 안중근을 비롯한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피고인은 뤼순감옥에서 마차를 타고 일본 헌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관동도독부 법원청사에 도착했다. 피고인들은 9시 고등법원 제1호 법정에 입장한 뒤 포박에서 플려나 피고인석에 앉았다.
이 날의 재판을 보고자 이른 아침부터 500여 방청객이 몰려들었으나 재판소 측은 300명으로 제한했다. 이 날 방청객은 러시아인 3명, 한국인 3명(안중근의 두 동생 정근, 공근과 안병찬 변호사), 더글라스 변호사만 외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많은 신문기자들이 세기의 재판을 지켜보았다.
공판 문답 초(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