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의 서재와 동재. 사진은 2개의 사진을 붙여 놓은 것이다.
김종성
이처럼 많은 권한과 특권을 향유했기 때문에, 장의는 일반 유생들에 비해 훨씬 더 빨리 출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가, 영조의 사돈이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1713~1778년)이다. 홍봉한의 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집필한 <한중록>을 보면, 성균관 장의 경력이 홍봉한의 인생에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일부 어휘를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었음을 밝혀둔다.
"계해년(1743년) 봄에 아버지께서 성균관 장의로 숭문당에 입시하시니, (아버지께서) 행하는 모든 범절(절차)을 영조께서 보시고는 매우 대단하게 여겨 (나중에 침전으로) 들어와 선희궁께 말씀하셨다. '오늘 세자를 위하여 정승 하나를 얻었노라.' '누구입니까?' '장의(掌議) 홍아무개요.' '이 사람을 위하여 나중에 알성과를 실시할 것이니, 이 사람이 급제하기를 마음 졸여 기대하고 있소.'"여기서 '숭문당'은 창경궁 안에 있는 전각이고,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이며, '알성시'는 임금의 참관 하에 열린 비정기적인 과거시험이었다.
숭문당에서 31세의 성균관 장의인 홍봉한을 유심히 관찰한 영조는 가슴이 쿵쿵 뛰었던 모양이다. 그의 일처리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성공을 갈구하는 리더는 외모가 좋은 이성보다는 능력이 좋은 인재를 만났을 때에 심장이 훨씬 더 콩닥콩닥 뛰는 법. 장의 홍봉한을 목격한 영조의 심장도 그러했던 것 같다.
일과를 마치고 침전으로 돌아온 영조는 친구 같은 후궁인 선희궁을 만나자마자 대뜸 "미래의 정승을 발견했다"면서 "다음에 알성시를 열어 홍봉한을 합격시켜줄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남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였다. 실제로, 얼마 안 있어 영조는 홍봉한의 딸을 며느리(훗날의 혜경궁 홍씨)로 맞아들였으며, 그간 번번이 낙방해온 홍봉한 역시 괜찮은 성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했다.
홍봉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성균관 장의는 임금의 눈에 쉽게 띌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출세를 하기에도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므로 성균관 장의는 드라마 속 하인수처럼 좀 뻐기고 다녀도 괜찮았던 것이다.
실제 성균관엔 장의 2명, 색장 4명이 있었다그럼, 성균관 장의란 자리는, 하인수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유생들 위에서 무소불위의 제왕처럼 군림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왕권도 비웃을 수 있는 위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다. 성균관에 존재했던 두 가지 제도적 장치가 장의의 권력독점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이다.
반중잡영 가운데에 '동재 장의에다가'로 시작하는 시가 있다. 장의의 권력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 한 가지를 이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재(東齋) 장의에다가 서재(西齋) 장의.신분이 높고 가문도 출중하다.색장(色掌)은 동서에서 상하로 나뉘니,여섯 명의 장의와 색장이 안배된다.이 시에 따르면, 성균관에는 두 명의 장의가 있었다. 오른쪽 기숙사인 동재와 왼쪽 기숙사인 서재에 각각 1명씩 있었던 것이다. <성균관 스캔들>에서는 하인수 혼자만 장의를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2명의 장의, 즉 2명의 수석회장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명의 장의 아래에는 색장들이 있었다. 옛날에는 색(色)이란 한자가 '종류별, 분과별' 같은 의미도 내포했다. 따라서 색장이란 것은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하면 '분과별 부회장'이란 뜻이 된다. 색장이 "동서에서 상하로 나뉘니"라는 것은 동재의 상하 구역에 각 1명씩 해서 2명의 색장, 서재의 상하 구역에 각 1명씩 해서 2명의 색장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총 4명의 색장이 존재한 것이다.
2명의 수석회장과 4명의 부회장을 합하면, 총 6명으로 구성된 회장단이 존재한 셈이다. 따라서 성균관 학생회는 일종의 공동회장단 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 명의 장의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특권과 기회는 많았지만, 막강파워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