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총영사관 지하감방, 이후 화원여사로 변했을 때 촬영한 것이다. 지금은 화원소학교가 되었다.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거사 직후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되어 그날 밤 이곳으로 인도되었다. 그런 뒤 10월 30일부터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 검찰관에게 이 건물 지하 감방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뒤로도 이 지하 감방에서 동북일대 항일 독립투사들이 일제에 체포되면 이곳으로 연행당해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은 악명 높던 곳이었다.
1999년 내가 첫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 지하실은 '화원여사'라는 간판을 단 싸구려 여인숙이었는데 지금은 건물 전체가 '하얼빈시 화원소학교'로 바꿔있었다. 사람팔자도 내일을 알 수 없지만 건물이나 땅 팔자도 마찬가지였다.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부처님 말씀이 떠올랐다.
김성백 집터거기서부터는 택시를 대절하여 본격 답사에 나섰다. 안내자가 전 헤이룽성위 당사연구소장이며 사학자인 김우종 선생으로, 서명훈 선생과 함께 조선민족 역사에 대가인지라 하얼빈 일대 답사에 더 이상 군말이 필요치 않았다.
다음 답사지는 조린공원으로 옛 하얼빈 공원이다. 거기로 가는 도중에 김우종 선생은 차를 세웠다. 삼림가 옛 김성백의 집터라고 했다. 1909년 10월 22일 밤 안중근 일행(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이 하얼빈 역에 도착한 뒤 곧장 찾아간 집이다.
김우종 선생의 말에 따르면, 당시 김성백씨는 송화강 철교 공사에도 관여한 상당한 재력가로 하얼빈 한인회장을 겸하여 동흥학교(東興學校)에서 우리 동포들에게 러시아어도 가르쳤다고 했다. 김성백씨는 유동하와 사돈 간으로 유동하의 누이동생이 김성백의 제수(넷째 아우 부인)였는데, 유동하의 아버지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로 안중근과도 그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