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거 직후의 안 의사
눈빛<대한국인 안중근>
그날 밤, 나는 김성백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새 옷을 모조리 벗고 수수한 양복 한 벌을 갈아입은 뒤에 단총(권총)을 지니고 바로 정거장으로 나가니 그때가 오전 7시쯤이었다.
거기(하얼빈 역)에 이르러 보니, 러시아 장관(코코후초프 러시아재정대신)과 군인들이 많이 와서 이토를 영접할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차 파는 집에 앉아서 차를 두서너 잔 마시며 기다렸다.
9시쯤 되어, 이토가 탄 특별기차가 와서 닿았다. 그때는 사람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나는 찻집 안에 앉아 그 동정을 엿보며 스스로 생각하기를"어느 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하며 십분 생각하되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즈음, 이윽고 이토가 차에서 내려오자 도열해 있는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소리가 하늘을 울리며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분한 생각이 북받쳐 일어나고 삼천리 길 업화(業火, 불같이 일어나는 노여움)가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어째서 세상이 일이 이같이 공평치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제로 뺏고 사람의 목숨을 참혹하게 해치는 자는 이같이 날뛰고 조금도 꺼림이 없는 대신, 죄 없이 어질고 약한 사람은 이처럼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하고는 다시 더 말할 것 없이 곧 뚜벅뚜벅 걸어서 용기 있게 나가 군대가 도열해 있는 뒤에까지 이르러 보니, 러시아 측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맨 앞 가운데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가진 한낱 조그마한 늙은이가 이같이 염치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활보하여 오고 있었다.
"저 놈이 필시 이토 노적(老賊)일 것이다."곧 단총을 뽑아들고, 그 오른 쪽을 향해 4발(실제는 3발)을 쏜 다음, 생각해 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내가 본시 이토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일 한 번 잘못 쏜다면 큰 일이 낭패가 되는 것이라, 그래서 다시 뒤쪽을 향해서, 일본인 일행 가운데서 가장 의젓해 보이는 자를 새로 목표하고 3발을 이어 쏘았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니, 만일 무죄한 사람을 잘못 쏘았다고 하면 일은 반드시 불미할 것이라 잠깐 정지하고 생각하며 머뭇거리는 사이에 러시아헌병이 와서 붙잡히니 그때가 바로 1909년 음역 9월 13일(양력(10월 26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분파소로 붙잡혀 갔다.
- <안응칠 역사> 177~178쪽1909년 10월 26일 아침의 지야이지스고 역1909년 10월 26일 아침, 지야이지스고 역에서 우덕순은 어쩔 수 없이 특별열차를 놓치고는 하얼빈에서 안중근의 성공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우덕순과 조도선이 아침도 거른 채 어슬렁거리자 식당 주인 세미코노프가 측은해 여기면서 아침을 차려주었다. 두 사람이 낮차로 하얼빈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하며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데 러시아 경비병 두 명이 식당으로 들어와 다짜고짜로 두 사람을 체포했다.
"왜 이러시오."조도선이 강력히 항의했으나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상부의 명령이다."두 사람은 경비초소로 연행되었다. 우덕순은 거기서 안중근이 하얼빈 역 플랫폼에서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우덕순은 환희에 젖었다. 오후 1시, 이토를 태운 남행 특별열차가 지야이지스고 역에 멎을 때 우덕순과 조도선은 포승줄에 묶인 채 하얼빈 행 북행 열차에 올랐다.
- 사키류조 <광야의 열사 안중근> 157쪽~158쪽 발췌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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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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