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도 그렇지만 해외에서도 늦은 밤 으슥한 골목길은 사고 위험지대가 아닌가. 오랜 학교생활의 체험에 따르면 사고를 당한 학생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굳이 가지 말라는 뒷골목을 기웃거리다가 매를 맞거나 돈을 빼앗기곤 했다.
아마 우범지대는 세계 어디나 비슷할 것이다.
겨울날씨로 밤공기가 찼다. 객차는 자체로 페치카 시설이 돼있어서 승무원들이 이따금 석탄을 집어넣어 실내 전체가 훈훈했다.
다시 잠을 청했으나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억지로 잠을 청하기보다는 시트를 걷고 일어나 객차 내 탁자를 펴고는 가방에 싸온 책을 꺼냈다. 왜 조선은 일본에게 망했을까?
왜 조선은 망했을까?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번역한 김준 선생은 그 머리글에서 다음과 같이 울분을 토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매천야록>을 읽은 것은 절산재사에서 한창 경전을 탐독하던 19살 때였다. 그때 나는 이 망국사(亡國史)를 한 줄 두 줄 읽어가다가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억누를 수 없어, 탁료수배(濁醪數杯, 막걸리 여러 잔)를 마시고는 청등벽라(靑燈碧羅, 얇은 비단을 씌운 푸른 등불)가 우거진 뜨락을 배회하면서 장탄식을 하곤 하였다. 그것은 내가 갑자기 우국지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강토가 호리(狐狸, 여우와 살쾡이) 같은 이민족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그 참상이 한 서생으로 하여금 울분을 터뜨리게 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배움이 적은 나 역시 10여 년째 항일유적을 답사하면서 참고하고자 근현대사나 독립운동사를 읽을 때면 그와 같은 울분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을 보면 망할 수밖에 없는 왕조였다. 다만 백성들의 힘으로 새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이민족에게 송두리째 나라와 강토를 빼앗긴 게 하늘에 사무치는 한으로 안타까웠다.
우리가 이웃 나라인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것은 이미 400여 년 앞인 임진왜란 때였다. 우리는 일본을 '왜(倭)' '왜국(倭國)' '왜구(倭寇)' 등으로 업신여기면서 지난날 우리 문화를 그들에게 전수해준 우월감에 도취하여 그들을 얕보았다. 그러는 새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 서구에서 입수한 조총을 만들어 대륙 정벌의 야욕을 불태웠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감지하고서도 전혀 대비치 않다가 일본이 쳐들어온 지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내주고 선조 임금은 의주로 도망치기 바빴다.
곧 평양까지 점령당하자 선조 임금이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떠남) 가려는 것을 충신 유성룡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우리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떠나신다면 조선 땅은 우리 것이 안 될 것이며 후일 백성들을 어찌 보려고 하십니까? 지금 동북의 여러 도가 남아 있고, 머지않아 호남지방에 충의의 선비들이 봉기할 것인데, 어찌 경솔히 명나라에 가십니까?"
선조 임금은 유성룡의 충간에 압록강을 건너려던 몽진 행렬은 멈췄지만 전란에 죽어가는 백성들의 안위보다 제 목숨 구걸에 급급한 못난 임금이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당시 조선 인구 500만 가운데 약 300만이 희생된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왜군의 총칼에, 역질에, 난리 중 먹을 게 없어 굶어죽었기 때문에 희생자가 많았다. 이때 임금을 비롯한 지도층들은 도망 다니기 바빴고, 왜군을 패주케 한 것은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義兵) 승병(僧兵) 때문이었다.
부패의 극치 - 삼정(三政) 문란
이런 참혹한 전란을 겪고도 당쟁과 사화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다시 1636년 병자호란을 맞았다. 인조 임금은 허겁지겁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갔으나 곧 청군에 포위되고 백성들은 청군의 칼날에 도륙을 당하고 젊은 여자들은 청군의 군막에 붙잡혀가 노리개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인조 임금이 한강나루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게 하는 삼배구두의 예를 올리며 항복 문서를 바쳤다. 그때 수많은 여자들이 청나라로 붙잡혀 갔는데 그들이 돌아오자 '환향녀(還鄕女)'라고 돌팔매질한 사대부들이었다.
조선 왕조는 당쟁과 사화가 잇달았는데, 이는 국리민복의 정책 대결이 아닌 지배계층들 간의 관직 쟁탈전, 정권 쟁탈전으로 숱한 인재들을 희생시켰다. 오랜 당쟁의 마지막 산물은 세도정치로 조선 왕조는 이미 기울기 시작하였다. 순조(23대), 헌종(24대), 철종(25대)에 이르기까지 안동 김씨(잠깐 풍양 조씨)들의 60년간 세도정치는 조선 왕조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등 삼정(三政)의 문란에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켰다.
토지세를 거두어들이는 전정의 경우, 무려 39종에 이르는 각종 부가세는 관리의 식사비, 여비, 가마 수리비, 감사의 유흥비, 지방 양반들의 족보 발간비, 서원의 제사 비용 등 온갖 명목으로 피땀 흘려 지은 백성들의 곡식을 뺏어갔다.
군정의 문란상을 보면 '백골징포(白骨徵布)'라 하여 죽은 자의 군포를 자손에게 물리는가 하면, '인징(隣徵)'이라 하여 도망자의 군포를 이웃에게, '족징(族徵)'이라 하여 도망자의 군포를 친척에게까지 물리는가 하면,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 하여 갓난아이들을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물렸다.
환정, 환곡(還穀)은 본래 백성들의 구휼(救恤) 책으로 기근이 들거나 춘궁기 때 관청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추수 때 이를 돌려받는 제도로 이자를 붙이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점차 이자가 붙기 시작하여 관청의 고리대로 변질되어 관리 아전들의 축재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그 무렵 환곡을 통한 수탈, 협잡, 농간의 방법은 100여 가지에 이르렀다는데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백성들에게 빌려 줄 때는 썩은 쌀, 겨와 모래가 반 넘어 섞인 쌀을 주고는 돌려받을 때는 백옥 같은 흰쌀로만 돌려받았다.
거기다가 나라의 요직은 세도 정치가들이 독식하자 백성들의 원한은 하늘을 찔러 평안도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경상도 진주민란 등 전국으로 파급하여 경상도에서 20군데, 전라도에서 37군데, 충청도에서 12군데를 비롯하여 경기도 황해도, 함경도까지 번져갔다.
대원군의 등장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막을 내린 듯하였으나, 곧 이은 여흥 민씨의 등장은 군대가 난을 일으키는 임오군란에까지 이르렀고, 그래도 정신 차리지 못한 집권층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백성 착취는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 조성오 <우리역사이야기 ․ 2> 40~44쪽 참고
관군이 농민군에 밀리자 조정은 청국에 농민군을 진압할 원병을 청하여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자 이때를 기다리던 일본이 조선에 상륙하여 우리나라를 두고 청일 양국이 각축을 벌였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그 여세로 러일전쟁을 일으켜 영국 미국의 도움으로 승리한 뒤 결국 우리는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는 한일병탄을 맞았다.
조선이 망한 데는 이웃 일본의 오랜 대륙 진출의 꿈인 정한론에 따른 야만적 침략에 있지만, 이를 경계치 못한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부패, '대중화(大中華)'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 '소중화(小中華)'에 안주하다가 지난날 우리 문화의 수혜국인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미꾸라지에게 뭐 물린 꼴"이 되고 말았다.
군항 블라디보스토크의 이곳저곳
2010.10.11 13:23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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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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