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장수 할머니.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기보다, 세월을 기다리는 할머니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조종안
버스에서 내리니까 어둑어둑했습니다. 저녁 7시도 안 되었으니까 한여름 같았으면 대낮처럼 밝았어야 하는데, 해가 짧아진 것을 실감했습니다. 고추, 가지, 깻잎, 약초 등을 길가에 진열해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할머니의 표정과 앉은 자세에서 장사가 지지리도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쳤을 때 나오는 자세이고 표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할머니처럼 손님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말을 붙이기도 어렵더군요.
할머니와 마주앉아 있는 아주머니에게 "고구마순 얼마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한 단에 2500원이라고 하더군요. 비싸다고 했더니 "아자씨도, 쪼꼬만 배추 한 포기도 5천 원인디 이걸 비싸다고 허믄 어치게 혀유!"라고 하더군요. 그냥 값을 물어봤을 뿐인데 미안했습니다.
"할머니도 고구마순 다듬어서 파시지 그래요?"하고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더니 "이 나이에 무슨 존 꼴을 더 보겄다고 무겁게 이것저것 들고 댕긴데유"라고 하시기에 "오늘 뭐 좀 팔았습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까 "손님이 와야 팔든지 말든지 허쥬"라고 하더군요. 설 명절 이후 8개월 넘게 기다려온 대목 장사인데, 할머니는 포기한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