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웅진주니어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느끼기에 따라 다를 텐데, 누군가는 닥터 수스님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테고, 아무개는 윌리엄 스타이그를 첫 손가락으로 삼을 테며, 어떤 이는 버지니아 리 버튼님 같은 그림쟁이는 없다고 침을 튀기리라 봅니다. 마리 홀 엣츠님을 으뜸으로 치는 분도 있을 테고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가 다르기에 그림책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다릅니다. 모두 하는 일과 즐기는 놀이가 다른 까닭에 그림책을 받아들이는 가슴이 다릅니다. 누구나 서 있는 곳과 삶터와 마음밭과 살림돈과 가방끈이 다르니까 그림책을 읽는 눈높이와 눈결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한테는 그림책을 일군 그림쟁이 이름을 하나하나 들며 누구 그림은 어떠하고 아무개 그림은 저떠하다 말할는지 모르나(이를테면 논문이나 비평하는 글을 쓰면서), 아이들은 그림책 하나하나를 꾸밈없이 살피고 받아들이면서 생각합니다. 굳이 앤서니 브라운님 그림책이라서 더 좋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딱히 닥터 수스님 그림책이기에 더 재미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반드시 윌리엄 스타이그님 그림책인 까닭에 한결 아름답다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꼭 마리 홀 엣츠님 그림책이니까 훨씬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림책 하나마다 다른 결을 살피고, 같은 그림쟁이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책마다 다른 손길과 마음길을 담았음을 읽습니다.
서른 살 나이에 그리는 그림책에는 서른 살까지 살아오며 마주하고 부대끼며 보듬은 삶을 담습니다. 마흔 살 나이에 내놓는 그림책에는 마흔 살까지 사는 동안 만나고 복닥이며 어루만진 삶을 싣습니다. 쉰 살 나이에 선보이는 그림책에는 쉰 살까지 지내며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며 어깨동무한 삶자락을 아로새깁니다. 이리하여 서른 살 나이에 그린 그림책에는 서른 살 그림쟁이 숨결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마흔 살 나이에 내놓은 그림책에는 마흔 살 그림쟁이 숨소리를 들으며 반갑습니다. 쉰 살 나이에 선보인 그림책에는 쉰 살 그림쟁이 숨넋을 곱씹으며 고맙습니다.
우리는 그림책 하나를 장만하여 읽는 자리에서 '우와, 아무개 그림책이 새로 나왔네!' 하고 놀랄 수 있을 터이나, 이렇게 놀라기 앞서 '이야, 이 그림책 참 좋구나!' 하고 놀라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렇게 놀라움이 절로 터져나오는 그림책이 아니고서는 구태여 사들일 까닭이 없고, 펼쳐 볼 일이란 없으며, 둘레에 나누거나 보여줄 구석이 없다고 느낍니다.
앤서니 브라운님 새 그림책 <나와 너>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영국에서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새로운 틀로 꾸며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으로서 이런 줄거리를 알 턱이 없습니다. 또 이런 줄거리를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영국 옛이야기이든 노르웨이 옛이야기이든 포르투갈 옛이야기이든 크게 돌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피며 돌아볼 대목이란 '그림책 <나와 너>가 내 가슴을 얼마나 두근두근 쿵쾅쿵쾅 울리는가'라든지 '그림책 <나와 너>가 내 마음자리에 어떻게 스며들면서 웃음이나 울음을 길어올리는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