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로 지정된 ‘백범 김구 은거의 집’
이규봉
'김구 은거의 집'이 있는 쇠실마을은 입구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했다.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에서 전남동부지부 회원들이 너무도 반갑게 맞이해준다. '백범 김구 선생 은거 기념관'은 동네 분들이 정성을 다해 백범 선생 탄신 130주년에 건립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민족의 큰 스승이신 백범 선생께서 이곳을 찾으신 때는 1898년 5월(음)이었다. 김두호라 칭한 23세의 젊은 선생은 김승묵(자: 광언) 댁에서 달포여를 머물며 동국역대라는 국사책을 중심으로 시대상을 논하였다. 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 중위를 죽이고 사형을 언도 받아 인천감옥에서 복역 중 후일을 위해 탈옥을 감행하여 피신을 위해 삼남 지방으로 내려오신 길이었다. 떠나실 때에야 '내가 일본사람을 죽이고 피해 다닌다'는 말을 하고 동국역대 표지에 이별의 아쉬움을 '이별난'이라는 시로 남기고,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며 떠나셨다. 그 후 40여성상을 생사도 알 수 없었던 터에 해방 후 환국한 선생께서 1946년 가을 이곳을 찾으시어 옛날을 회상하시고 은혜에 감사하였고 가가호호에 대형 존영과 휘호 등을 하사하시어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1990년에 주민들의 열화같은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했던 바 2006년에야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 기념관을 지을 것을 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서울 백범 선생 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본 기념관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 시설은 모든 국민과 특히 이 고장 청소년들의 산교육장화로 선생의 정신 계승 및 국가 발전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위에서 언급한 '이별난'이란 시를 지금 김구 은거의 집 주인이 내준다. 한시이나 번역된 것은 다음과 같다.
이별하기란 어렵구나 참으로 이별은 어려운데이별한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구쳐꽃나무 한 가지를 꺾어 절반씩을 나눠한 가지는 종가댁에 남겨두고 한 가지는 가지고 떠납니다.넓은 천지에 살아서 또 만날 것인지이 강산을 버리고 떠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인데네 사람이 함께 한 달여 동안 한가로이 놀고 지내다이별을 아쉬워하며 덧없이 떠납니다.먼 훗날 이것을 보시게 되면 혹시 오늘의 나를회상할까 생각되어 정표로 남겨 두고멀리멀리 떠나갑니다.쇠실마을은 보성에서도 깊은 골짜기에 속한 안동 김씨의 집성촌으로, 큰길가에서 들어가 앉아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당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던 백범 선생이 오랜만에 편히 쉬며 앞날을 위한 힘을 축적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보였다. 청년 백범은 1898년 여름 무렵 이곳 김광언 댁에서 40여 일 동안 은거하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치고 독립의식을 고취하다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어지럽던 시대 그의 은거를 도왔던 마을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은 광복 후 1946년 9월 보은을 방문을 하면서 더욱 빛나게 된다. 후손들은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김구선생이 건네준 역사책과 글을 보존하고 있다. 마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김광언의 증손자인 집주인 김태만 선생은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백범 선생이 떠난다고 했을 때 이웃의 가난한 마을 주민이 한 마리밖에 없는 씨암탉을 잡아 대접하여 처음으로 고기 맛을 보았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