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용보일러 대신 기름과 화목 보일러를 각각 설치했다. 온수를 다락방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 높은 곳에 물통을 설치했다.
송성영
"그러지 마시고요. 아예 따로 따로 설치하세요. 겸용보일러는 한 번 고장 나면 둘 다 쓸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어 골치 아픈 일이 생겨요."
"따로 따로 장만하면 비용이 문제라서.""겸용 보일러 하고 비용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아요. 화목 보일러를 구입하면 보조금도 있을 텐데요." 결국 화목 보일러와 기름보일러를 따로 따로 장만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화목 보일러를 구입하는 농가에 지원하는 정부보조금이라는 게 있다고 하니 일석이조였습니다.
하지만 고흥군청에 알아봤더니 이미 지원 사업이 다 끝난 상태라고 합니다. 그것도 지난해 (2009년도) 정부 지원금을 받아 화목보일러를 설치한 농가는 4가구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군 전체 농가에 지원했던 것이 4대가 전부라니, 정부는 쥐꼬리만큼도 아니고 조족지혈도 아닌, 먼지만큼의 지원을 해주면서 마치 원하는 농가 전체에 혜택이 돌아가는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목 보일러의 경우처럼 일반 농가나 귀농자들을 위한 정부의 지원 사업들이 대개가 그러했습니다. 마치 모든 농가나 귀농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처럼 농가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실제 지원 사업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군 전체 농가에 몇 가구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2010년부터는 화목 보일러 지원 사업을 중지하고 톱밥 등으로 만든 청정 연료 '목재펠릿' 사용 보일러(펠릿 보일러)에 대한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었습니다(자부담 30% 산림청 보조금 70%). 하지만 연료로 쓰이는 '목재펠릿' 구입비가 경유비와 거의 같아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그림에 떡입니다. 연료비 때문에 화목보일러를 쓰고자 하는 농가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펠릿 보일러마저 전체 농가에 고루 혜택을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흥군에 알아보니 전체 농가에 25대를 보조하고 있었습니다. 고흥군 전체 농가에 정부 보조금 혜택을 받게 되는 펠릿 보일러가 25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운 좋은 사람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어찌 고흥군만 해당 되는 일이겠습니까?
애초에 정부보조금 따위에 눈 돌렸던 내 자신이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정부에게 바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생명의 강을 죄 파헤쳐 죽음의 강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도 부족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꽃 다운 젊은 이들의 죽음을 팔아 국민들에게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고 있는 추잡한 정부가 아닙니까?
저들의 '공포 정치'의 주 대상은 농민들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농민들은 나이가 많습니다. 전쟁을 겪어온 나이 많은 농민들에게 '전쟁'이라는 단어는 공포 그 자체입니다. 저들은 그렇게 '전쟁'이라는 무지막지한 공포를 살포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겠다는 속셈이 아닐까요. 전쟁이 발발하면 제일 먼저 꽁지 빠지게 내뺄 인간들이 말입니다.
좋게 길을 가다가도 꼭 추잡한 인간들과 마주쳐 열을 받게 되는 일이 종종 있듯이 보일러 얘기를 하다가 잠시 샛길로 빠졌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집은 기름보일러와 화목보일러를 각각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방바닥 콘크리트를 말린다는 이유로 24시간 팡팡 돌아가는 기름보일러 소리를 들어가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소리는 자연을 쥐어짜는 소리다. 하루 24시간을 따습게 지내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많은 자연을 쥐어짜야만 하는가? 자연을 쥐여 짜서 살아가는 나의 죄업은 얼마나 클까? 그 죄업을 갚음 할 수 있는 길은 자연으로 부터 받은 만큼 다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걸 어떻게 되돌려 놓는다는 말인가?' 아무리 좋은 생각을 쥐어 짜 낸다 해도 결국 내 편리에 의한 변명에 불과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누린다는 것은 자연 앞에 고맙고 또한 죄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기름보일러를 돌려 콘크리트 방바닥을 말리는 동안 목수들은 두 팀으로 나눠 한 팀은 마저 못한 외부 벽면 작업을 하고 다른 팀은 처가에서 가져온 목재로 마루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마루 작업은 건물 벽에서 2미터쯤 내놓기로 했는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건축자재상에서 구입한 규격화된 목재가 아니기에 그 굵기와 넓이 길이가 각각 달라 목수들이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송별회 하러 홀로 공주로 떠난 아들"아빠, 나 내일 공주로 가야 돼."컴퓨터를 고장 사건으로 집 짓는 현장에서 일주일째 유배 생활을 하던 인효 녀석이 공주로 떠나겠다고 합니다.
"누구 맘대로? 너 인마 유배 생활을 더 해야 혀.""내일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하고 친구들 만나기로 약속 했어.""뭐 때미?""고흥으로 이사 가기 전에 송별회 해주겠데."녀석의 송별회 통보는 유배살이에 종지부 찍는 선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다음날 12시 20분발 순천행 버스 시간에 맞춰 고흥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녀석이 머리 털 나고 처음으로 혼자서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녀석은 순천에 도착하면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순천역에 도착해 논산행 열차를 타게 될 것이고 논산에서 다시 공주로 향하는 버스를 갈아타게 될 것이었습니다.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녀석은 터미널 화장실을 오락가락했습니다. 혼자서 장거리 여행길에 오른다는 것이 내내 긴장이 되는 모양입니다.
"돈은 그 거면 된겨?":"충분할껴."녀석은 내가 챙겨준 만 원짜리 지폐 3장을 재차 확인하고 여기 저기 주머니를 까 뒤집어가며 천 원짜리 지폐를 헤아립니다. 합산해 보더니 4만 원이 조금 넘는다고 합니다. 한 달에 만 원 정도의 용돈으로도 기분 좋아 하는 녀석이었기에 4만원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돈을 써 보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기차 타면 맛있는 거 사먹어라 잉.""알았어.""사람들이 그럴 거여. 아빠 수염이 허애서 내가 니 할아버지라고 생각 할껴 잉.""......."녀석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농담 한마디 던졌는데도 묵묵부답 미소만 짓습니다. 사실 그 말은 어린 자식을 먼 길 떠나보내는 애비 자신의 긴장을 풀기 위한 농담이기도 했습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내 시선에서 벗어날 때 까지 손을 흔들어 대는 녀석을 떠나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붕어빵을 찍어내는 포장마차를 찾아 들었습니다. 녀석의 손에 붕어빵 한 봉다리를 쥐어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아줌니 제가 몇 살 쯤으로 보입니까?""글쎄요? 피부가 땡땡허니 70세는 안 된 보이고.""아이구, 인저 오십 하난디 큰 일 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