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타오르는 이순(耳順)의 눈빛

지성찬 시인의 시조집 <대화동 일기>

등록 2010.03.20 14:54수정 2010.03.20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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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찬 시조집 <대화동 일기>  지성찬 시인은 내년이면 고희를 맞지만 시인의 시각은 아직도 꿈틀거리는 안테나와 같이 활발하다,
지성찬 시조집 <대화동 일기> 지성찬 시인은 내년이면 고희를 맞지만 시인의 시각은 아직도 꿈틀거리는 안테나와 같이 활발하다,문학공원
시인을 일러 각별한 감각의 안테나를 가지고 세상과 교신하는 독립정부라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시가 유일한 모습과 느낌으로 존재하는 신선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르는 '세상' 은 인간과 자연을 아우르는 광역적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시인이 교신하는 세상과의 관계는 늘 원만하지만은 않은데 끊임없는 연민과 다툼으로 불화하기도 하고 사랑과 축복으로 들끓기도 하는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들이 견지하는 시각도 천차만별이어서 교신하는 부분도 다르고 인식하는 견해와 방편까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인들의 작품들을 해석하고 비평하는 것은 더욱 힘들고 어려움이 많으며 아주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평균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주위에 높은 나이임에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분들이 많아졌다. 시단에도 이러한 추세는 이어져서 60대 청년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노인이라는 말은 아예 고희나 되어야 붙일 수 있는 연세가 되었다. 고희가 넘은 한 원로시인을 인터뷰하면서 언제까지 시를 쓰실 것이냐고 여쭈었더니 예상을 깨고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시는 연애를 해야 잘 쓸 수 있는데 그게 되질 않으니 이젠 억지로 쓰지 않으려 한다. 내가 말하는 연애란 세상과의 연애를 말하는데 이제 나이가 들고 삶이 느슨해져서 뛰어갈 일도 피터지게 싸우고 불화할 일도 없어지니 시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이다. 시는 어떤 격렬한 생각이나 갈등이 생길 때 그 긴장감으로 튀어나오는 법인데 그런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나기 어렵다. 그런데 주위에 나이 들어서도 계속 작품을 발표하는 노시인들이 있는데 자칫 관념에 빠지거나 나이든 티를 내느라 아류의 시만 양산하는 모습을 보면 외려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지성찬 시인도 내년이면 고희를 맞게 되는 거의 50년 시력의 소유자이다. 이제 전진보다는 수성에 더 신경을 써야하는 나이가 되셨다. 그렇지 못하면 위에 언급한 노시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를 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찬 시인의 도전 정신은 아직 날이 선 채로 그 빛을 발하고 있으니 시집 말미에 해설을 쓴 김순진 시인은 '동심과 소박함, 그 낮은 곳으로의 끊임없는 도전' 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의 정신적인 근육은 매우 발달하여 있어서 불의를 보면 헐크의 근육처럼 솟아오르며, 아름다움을 보면 바다 속의 물미역줄기처럼 함께 흐르며 인생 자체를 즐기시는 분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오종문 시인도 불교문학 서평을 통하여 <대화동 일기>를 말하고 있다. '자연과의 융화 속에서 형성된 인격의 산물' 로 표현한 지성찬 시인의 작품들은 주로 자연풍광과 시간의 흐름을 유연하게 표현한 작품들을 통하여 (바쁜 일상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연과 소통하면서 삶과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고희를 눈앞에 두고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과 무소유의 삶, 그리고 자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의 귀거래사라 할 수 있다) 라고 평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일산에 살며 호수공원을 비롯한 풍광과 소회를 읊은 열 두 수의 장편시 '일산선유음'을 꼽고 있다.

이번 시집에 상재한 아흔 세 편의 작품은 중후한 연륜을 느끼게 하는 명징한 언어들로 꾸려져 있다. 그것들은 곧 아포리즘으로 다가와 무릎을 치게 만들고 따듯하게 우리를 안아주는 것이다. 앞의 두 평자가 공통적으로 이끌어낸 '무소유와 겸손의 삶' 이 시집의 많은 부분이라 할 수 있지만 필자는 고희를 앞두고도 아직 꺼지지 않고 있는 지성찬 시인의 또 다른 시각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소한 것' 에 대한 배려와 '고된 현실' 에 대한 따스한 마음이라 말할 수 있다.

버려진 흙이었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갈증에 물을 주고 가슴에 불을 질러
질그릇 하나 쯤은 건지리, 모두를 태운 후에


- '질그릇' 첫 수

벚꽃이 봄 하늘을 화사하게 색칠한 후
낙화, 그 자리에 두고 간 작은 열매
그 마저 버리고 나서 빈 하늘을 안고 가네


- ' 대화동 일기' 마지막 수 -

시인은 유독 '작고 하잘 것 없는 것' 에 관심이 많다. 하긴 시인의 눈빛이 아니면 누가 그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게 눈이나 한 번 줄 것인가. 질척한 땅에 개미 눈물만큼 작게 피는 냉이꽃, 한 겨울을 이겨내고 낙엽 속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무명의 작은 풀', '무우의 파란 새싹' 등에서 생명과 우주의 진리를 읽고 있는 시인의 눈은 따듯하다. 버려진 흙에 물과 불을 주어 구워 낸 '질그릇' 도 훌륭한 삶의 표본이 될 수 있고 꽃과 열매를 다 버리고 떠난 빈 하늘은 마치 무소유의 생을 잘 마무리 하고 세상을 떠난 법정스님의 자취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하다.

이런 시인의 마음은 '사랑에 빚진 자 되어' 라고 제목을 붙인 자서의 구석구석에서도 우러나고 있다. '맑은 공기와 함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여건을 허락한'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시집 제목을 <대화동 일기>로 하였다는 것과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라는 표현은 차라리 시보다 더 절절하다.

재개발 봉천동에
공사가 끝난 후에

수지를 맞추려는
수지지구로 달려갔다

죽어서
용인에 묻은 것
다시 파서 들춰낸다

무엇인가 수상하다
오늘의 하늘에서

재개발 설계도를
그리는 건 아닐는지

토지는
저의 주인도
땅 속에 파묻는다

- '무엇인가 수상하다' 전문 -

대도시에서 '재개발' 이라는 단어는 너무 익숙하고 많이 듣게 된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정리되지 못하고 허술한 건축물들을 보기 좋게 계획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경제적인 요인 때문에 비인간적이고 무리한 시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작년 벽두를 뜨겁게 달궜던 '용산 참사' 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수지를 맞추려는' 공사업자들과 시행사들의 계산만 강조된 아파트 값은 평당 몇 천 만원을 호가하게 되어 결국 그곳에 살던 거주자들의 대부분은 집을 잃고 쫓겨나는 형국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시인은 결국 재개발의 틈새에서 아우성치는 인간들의 군상을 '토지는/ 저의 주인도/ 땅 속에 파묻는다' 라고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늘 현실의 그릇된 상황들과 불화하고 저항하며 화해를 도모하려고 몸부림치는 존재이다. 굳이 아놀드 하우저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회적 현실의 문제와 모순' 은 작가들에게 영원한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이에 비해 시인의 붓은 지극히 나약하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들불과 같이 너른 벌판을 태워버릴 수도 있는 강력한 불길이 되기도 한다. 법정스님의 예를 다시 보아도 스님의 많은 글귀들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지 않았더라면 법정이라는 존재가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와 피씨방
사우나가 동거한 빌딩

지하에 숨은 룸싸롱
10층쯤엔 모텔을 두고

층층이
방에 차린 것이
사람의 마음 같다.

- '마음의 방' 전문 -

일산에 가면 아파트가 가까운 곳에도 번화하고 위와 같은 형상을 갖춘 빌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교회와 사우나는 죄를 고백하고 사함을 받거나 몸을 닦고 쉬는 곳이며 룸싸롱과 모텔, 또는 피씨방은 인간에게 죄를 더하면 더했지 이로울 것이 없는 업소들이다. 시인은 이미 '지하의 룸싸롱과 10층의 모텔' 로 이어지는 루트가 수많은 생각과 번민이 자리 잡은 '사람의 마음' 과 흡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선과 악이, 성실과 나태가, 사랑과 미움이 한 몸에서 시작되고 부대끼다가 끝나야 하는 우리 인간의 군상처럼 도시의 복합건물은 허전하게 서있는 것이다.

콩밭에는
콩 같은 것이
수수밭에는
수수 같은 것이

진품처럼
뿌리를 내려
영토를
넓혀간다

이 가을
나의 곡식 밭에는
비슷한 풀만
가득하네.

- '사이비' 전문 -

우리는 흔히 '사이비' 라 하면 종교를 떠올리게 된다. 사이비란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른' 것을 뜻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내세우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 않고, 부처를 앞세우지만 자세히 들어가 보면 교주는 따로 있는 것이 사이비 종교의 흔한 실상이다. 지성찬 선생이 작품에서 혹평하고 있는 '나의 곡식 밭에는' 사실 좋은 열매들로 가득하다. 선생은 명문대학을 나와 무역업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자제들도 훌륭하고 건실하게 길렀으며 개인적으로는 꾸준하게 시작에 임하고 계시지 않은가. 그럼에도 '비슷한 풀만/ 가득하네' 라고 고백하며 제목조차 서늘한 '사이비'를 말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 시를 읽는 독자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은 '사이비'가 아니었는지 등골이 서늘하게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풍광과 살아온 자신의 삶을 겸손하게 반성하는 것보다, 감사할 줄 알며 불의에 저항하고 언제나 세상의 작고 힘없는 군상들을 다독여 보듬는 일은 시인에게 중요하고 귀중한 사명이라 말하고 싶다. 고희를 바라보는 노시인의 안테나에 아직도 세상의 작고 어두운 장면이 감지되고 그로 인해 고뇌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하다. 대도시의 수상한 재개발과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들이 지성찬 선생의 시의 힘과 기도로 부디 조화로운 화해를 통하여 상생의 길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시인이시여 오래도록 꿈틀거리는 안테나로 우리들 세상의 구석구석을 지켜주실 것을 기대한다.

대화동일기

지성찬 지음,
문학공원, 2009


#대화동 일기 #지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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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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