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
이정근
안개에 묻혀있던 산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활기를 찾았다. 대장간 풀무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불에 달구어진 시우쇠가 뽕쇠와 교접하며 열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모루위에 벌거숭이로 올라선 그들을 확실하게 교합케 하기 위해서는 메를 쳐야 한다.
딸그락 닥닥. 망치 소리가 경쾌하다. 메를 유도하는 대갈마치가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장단을 맞추며 춤을 추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대장간에 권대식이 찾아왔다.
"어제 몇 자루나 만들었는가?""창 다섯 자루와 칼 서른 자루가 목표인데 스물일곱 자루밖에 만들지 못했습니다.""힘든 일을 하는 너희들만 특별히 점심을 내주라 일렀는데 왜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는가?"대장간 식구들을 제외한 모든 산채 사람들은 점심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는 것으로 때웠다.
"메를 치는 석칠이가 토굴에 갇혀 있어서리..."야장이 말끝을 흐리며 뒷덜미를 긁적였다. 대장간에서 쇠가 무기로 변하려면 쇠를 벼리는 야장의 숙련도 필요하지만 메쟁이의 메가 절대적이다. 메를 높이 쳐들고 후려쳐야 쇠가 정신을 차린다. 시우쇠가 메를 맞아야 뽕쇠가 되고 그들을 한 몸으로 붙여줘야 칼이 된다.
"그 녀석은 토굴에 갇힐 만한 죄를 지었느니라."산채에 범죄자를 가두어 두는 사옥이 있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야장이 읍소했다.
환향녀는 죄인이 아니다. 나라가 죄인이다"불씨에게 공양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정성껏 밥을 해주는 공양주는 지금 비록 환향녀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그녀들 역시 우리 누이처럼 양갓집 규수였고 아이의 어미였고 지아비의 아낙이었다. 그들이 청나라에 잡혀가 몸을 더럽혀 돌아왔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목숨을 걸고 절개를 지킨 여인도 있고 불가항력에 몸을 더럽힌 여인도 있을 것이다. 허나, 그들이 죄인이 아니다. 이 나라가 죄인이다. 환향녀라는 불명예도 억울한데 그녀들을 희롱하고 추행했으니 벌을 받아도 싸다."권대식의 태도는 싸늘했다.
"지가 책임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책임진다는 말 믿어도 되겠는가?""네."풀무간 열기에 검게 그을린 야장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화승총을 책임지고 만들어내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권대식이 대장장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총신은 다 만들었으나 점화구에 문제가 있어 애를 먹었는데 가짜 마패를 만들어 팔다 쫓기던 놈이 산채에 들어왔습니다. 그놈 손재주가 보통이 아닙니다. 보름만 말미를 주시면 꼭 만들어 내겠습니다."옆자리에 있던 이지험이 권대용에게 귀엣말을 속삭였다. 석칠을 축제용으로 쓰고 풀어주자는 것이다. 역시 이지험은 천하의 장자방이었다. 매부 홍영진을 끌어들여 산채를 만든 것도 그였고 숨 막힐 것 같은 산채생활에서 놀이를 고안해낸 것도 그였다.
"좋다. 너의 약속을 믿고 메쟁이를 풀어주겠다.""우와! 우리 대장 최고!!"열기 가득한 대장간에 환호가 터졌다. 힘세고 덩치 좋은 메쟁이가 절실히 필요한 마당에 갇혀있던 석칠이가 풀려난다니 더 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자신의 막차로 돌아온 권대식이 부관에게 축제를 준비하라 지시했다. 산체의 축제. 그것은 먹고 마시고 춤추는 축제가 아니라 멍석말이였다. 마을에서 못된 자를 징치하는 수단으로 썼던 멍석말이를 산채에서는 축제로 활용했다.
징벌이 지나치면 배신 때린다제 발로 산채에 들어온 자라 할지라도 죄를 짓고 사옥에 갇히게 되면 처음엔 뉘우치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둔 자에게 적개심을 표출한다. 이것이 필요이상의 시간이 지나면 증오심으로 축적되고 급기야는 관가에 고변하는 배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이지험은 죄인에게 어느 정도 벌을 가했다 생각하면 명분을 내세워 풀어주자는 것이다. 이 때 축제 도구가 멍석말이다.
사옥에서 끌려나온 석칠이가 권대식 앞에 섰다. 까칠한 얼굴이다.
"석칠이는 내가 한 말을 따라 한다. 알겠는가?""네."석칠이의 대답에 힘이 없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다. 크게 한다. 알겠는가?""네.""산채에서 남녀유별은 있지만 차별은 없다.""차별은 없다.""산채의 여자는 희롱의 대상이 아니라 동지다.""동지다."석칠이의 복창이 끝나자 그의 몸이 멍석에 말렸다. 산채꾼들이 히히덕 거리며 멍석을 걷어찼다. 유쾌하게 웃으며 몽둥이질도 했다. 멍석에 말린 석칠이가 비명을 지르면 지를수록 잔잔한 발길질이 쏟아지며 웃음꽃이 피었다.
산채꾼들에겐 놀이가 없다. 건장한 사내들끼리 부대끼며 살다보니 삭막하다. 때론 눈알을 부라리며 드잡이가 벌어진다. 이러한 산채에 죄인을 멍석에 말아 짓밟고 몽둥이질을 하라하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단, 징치의 수단으로 쓰는 마을에서처럼 죽도록 두들겨 패지 않는 것이 산채의 관습법이었다.
덧붙이는 글 | 배오개-이현(梨峴)이라고도 하며 오늘날 동대문 시장
칠패-서소문밖에 있던 시장으로 오늘날의 남대문 시장 전신
혼전(魂殿)-선대왕의 위패와 초상을 모셨던 곳
지편(紙片)-쪽지
시우쇠-저탄소 강
뽕쇠-고탄소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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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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