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곶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요충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는 이곳을 공략하여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이정근
"이형익과 조숙의도 나쁜 년 놈이지만 진정 쳐 죽일 놈은 김자점이다. 그 놈이 어떤 놈이냐. 병자년 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의주 용골산 봉화를 보고서 '소식이 도성에 이르면 소란스러워진다'고 묵살했던 놈이 바로 그놈이다. 부관이 적정을 보고하자 '망녕된 말로 군정(軍情)을 어지럽히려 드느냐?'고 칼을 빼어 신용을 죽이려 했던 놈이다. 이런 놈이 서북방면군 도원수에 있었다니 나라가 망해도 싸다. 군율에 따라 열 번 죽어도 모자랄 이런 놈이 살아남아 임금의 총기를 흐리고 있으니 고달픈 건 우리 백성들뿐이다."
안익신이 동지들의 분기에 불을 지폈다.
"그 놈도 나쁜 놈이지만 더 나쁜 놈들의 일당이 바로 아랫마을에 살고 있소. 호란 전, '명나라와 교호를 끊고 형제의 나라로 살자'고 청나라 사신이 한양에 들어왔을 때 '사신의 목을 베자'고 주장한 놈이 있소. 그 놈이 그 다음에 한 말이 가관이오. '만일 오랑캐가 쳐들어오면 나의 여덟 아들을 이끌고 나가 쳐서 물리치겠다'했소. 헌데, 어찌 된 줄 아시오. 정작 오랑캐가 양철평을 통과하여 도성 가까이 쳐들어오자 다섯째 아들은 세도 있는 사람들 틈에 끼어 강화도로 도망갔소. 강화도가 어디 우리 같은 천민들은 피난이나 갈 수 있는 곳이오?"
이지험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세자빈과 봉림대군이 들어갔던 강화도가 함락되자 그 녀석은 변복하고 빠져나와 금산에 숨어들었고 그 녀석의 마누라는 '되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목을 매었소. 이렇게 비루한 족속들이 자결한 여인을 열녀라 칭송하고 정려각을 세워 기려야 한다고 요란을 떨고 있소. 여인의 뜻은 가상하지만 이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놈들의 비열한 면피행동이오. 나라를 굳건하게 지켰으면 그러한 일이 없었을 것 아니오. 힘이 약해 당했으면 같이 당해야지 여자는 죽도록 놔두고 지놈들은 도망가고 참 뻔뻔한 놈들이오.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여인을 환향녀라 핍박하고, 지켜주지 못하여 죽어간 여인을 열녀라 치장하여 또 다른 여인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책임 있는 사내들은 새장가 들고, 참 지랄 같은 세상이오."
"그 집이 어디냐? 당장에 쳐내려가 박살을 내버리자."
산채가 술렁거렸다.
"바로 아래동네 병사리다."
금방이라도 쳐들어갈 듯이 사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 자들 진정하라. 우리가 이렇게 일어선 것은 호족 한 둘을 징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 우리가 매일같이 닭의 벼슬을 닮은 산을 바라보며 절을 하는 것이 닭 짓이란 말이오?"
닭의 볕을 쓴 용을 닮았다하여 계룡이라는 이름을 얻은 산이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