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곰국곰국. 소금과 파를 넣어서 적당히 간을 하지 않은 곰국은 그 맛이 숭늉처럼 밍밍하다.
한성수
내게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할 만한 경험이 있다. 엄마의 곰국이 그렇다. 어렸을 적 나는 곰국을 싫어했다. 아이의 눈에 비친 곰국은 숭늉과 다를 바 없었다. 사실 소금과 파를 넣어서 적당히 간을 하지 않은 곰국은 그 맛이 숭늉처럼 밍밍하다. 나는 곰국과 숭늉의 차이가 소금을 넣고 안 넣고의 차이라고 믿었다.
또 어린 마음에 으레 고깃국이란 빨간 양념이 들어간 육개장이나 소고기국 정도는 되어야지, 라는 거만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인지, 밥상에 곰국이 올라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들의 오만방자한 자태를 본 엄마는 이걸 "보약이다 생각케라~!"라며, 내 입을 억지로 벌려 곰국을 밀어 넣었다.
엄마도 곰국도 죄다 미웠다. 그 때는 몰랐다. 곰국이 보약처럼 힘의 원천이 된다는 엄마의 말을. 돌이켜보면 그때 엄마는 아들에게 원기를 불어넣어주고 싶었던 거다. 남들보다 강하고 꼿꼿하게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 세파를 견뎌내는 힘을 키워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사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아버지는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았고,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새마을 정신'으로 무장한 채 맨손으로 세상과 대적했으며, 어머니는 집을 끼고 장사를 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예쁜 언니들과 다방을 운영했다. 훗날 차를 팔아 그러모은 돈으로 90년대 외식 문화의 중심에 있던 돈가스 집을 열었다. 또 다시 후일에는 일명 경상도 식으로 '고디탕(다슬기로 만든 탕이다)'이라는 걸 만드는 장사도 했다. 또 간간이 친구를 도와 일식집에서 회 뜨는 일도 해보셨고, 한식당에서 잔일도 거들었다. 지금은 형과 함께 삼겹살 집을 운영하고 있다.
글로벌한 요리사 엄마 : 다방, 돈가스집, 고디탕집, 삼겹살집 차, 한식, 양식, 일식을 두루 거친 우리 엄마의 손맛은 가히 따를 자가 없다. 중국의 차 문화도 어슴푸레 알고, 일본식으로 회 뜨는 법과 양키들의 칼질도 대충 짐작하고 있는 우리 엄마는 글로벌한 요리사다.
엄마는 평생 자식들의 의식주를 책임지기 위해 음식을 만들어 돈을 벌었고, 또 그 솜씨로 자식들의 음식도 책임지셨다. 엄마는 365일 쉬지 않고 밥을 한다. 특히나 장사를 할라치면, 하루라도 쉬는 법이 없다.
그래서 어머니는 예나 지금이나 가게 딸린 방에서 살고 있다. 형이 결혼해서 아파트를 얻어 독립하고, 아버지가 시골에 땅을 사서 번듯한 집을 지어놓았어도, 어머니는 가게 한 편에 마련된 방에서 홀로 잠을 주무신다. 아버지가 잔소리를 하든, 아들들이 걱정을 하든 당신은 그게 편하단다.
지난 설 당일에도 엄마는 "한 테이블이라도 받아서 돈 벌라카믄 문을 열어야지, 와 안 여노!"라면서 차례를 지내자마자 가게 문을 열었고, 그날 엄마는 두 솥이나 되는 밥을 모두 팔고 난 후에 자리에 누우셨다. 엄마의 인생이란 이렇듯 손에 물이 마를 날 없는 삶이다.
그때 나는, 엄마의 인생이 밥 짓고 국 끓이는 여자의 인생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를 폄하하거나,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엄마의 인생은 정말 그랬다. 누군가를 위해 차를 만들고,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그네들의 목마른 입을 촉촉이 적셔주는 게 엄마의 인생이었다.
엄마의 곰국에 담긴 뜨거운 삶의 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