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목단문태고동중국 북송시대 양각청자로, 화려한 당초문양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송나라 자기에는 양각무늬는 등장하지만 그림을 그리거나 상감기법을 사용한 청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대신, 북송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당나라의 당삼채와 같은 화려한 색채기술을 이용한 자기가 있어서 단색청자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중국
무신들은 자신들만의 청자를 만들려니 순청자도, 상형청자도, 양각청자도 아닌 새로운 청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하지만 그림을 그려 넣는 것만 빼고는 이미 다 세상에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뼈 속까지 문신들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힌 무신들이 문신들을 따라할리 없었습니다.
무신들의 제작 의뢰를 받은 고려의 도공들은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려 넣자니 오히려 지저분해지고, 그렇다고 그것 외엔 딱히 방법도 없고...
그러나 창조성에서는 그 어떤 민족보다 우수한 우리민족의 선조답게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청자의 표면을 파서 색을 메워 그림을 그려 내면 어떨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표면을 파서 문양을 만들었기 때문에 '상감기법'이라고 부르는 이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청자가 '상감청자'입니다.
물론 상감기법은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장식품인 금속에도 상감기법을 이용해서 금과 은을 세공하거나 보석을 넣는 일을 했던 것이니 아주 새로운 기법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기법 자체만으로 창조적이다, 하고 감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왜 상감청자가 그토록 위대한 것일까요?
**상감청자속 숨은 과학의 힘상감기법은 고려청자가 처음으로 도입한 방법은 아닙니다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렇게 묻게 됩니다.
'왜 고려청자만이 이 기법을 도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 상감청자에는 상감기법이 가능하게 된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유약에 있었습니다. 아무리 상감기법이 기발하고, 그래서 멋진 무늬와 그림을 그려낸다고 해도 청자유약이 희끄무레하고 불투명하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지저분해서 안하느니만 못하단 소리를 들었을법합니다.
그러니까, 상감기법으로 만든 밑그림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아니 더욱 화려하게 빛나게 해준 유약, 그런 유약을 만들어낸 비밀의 물질이 바로 '인'입니다.
비오는 날 시골에서는 하얀 달덩어리 같은 불빛이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사람들은 그것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도깨비불'이라고 부르곤 하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본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옛날 어린 시절에 본 기억이 나는데요, 어두컴컴하고 흐린 날, 비가 그칠 때쯤 가랑비 속으로 올라가던 그 놀라운 경험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경이롭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것이 도깨비불인지도 몰랐습니다만.
바로 그 도깨비불의 정체가 '인'입니다. 인은 우리 몸의 뼈를 이루는 구성성분인데요, 무덤 속 시체의 뼈 속에 있었던 인이 증발하면 도깨비불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원소기호 P)은 자연계속에 12번째로 많은 원소이니만큼 유약 속에 쉽게 섞여 들어옵니다.
중국 유약에는 이 인이 우리나라 청자보다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청자보다 훨씬 불투명합니다. 이 유약을 발라 구운 청자에 얇게 새긴 조각이나 그림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기에다 상감기법으로 섬세하고 다양한 그림을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불투명한 중국 청자유약으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상감청자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기술적 배경에는 기법이 참신함에 더해 기술적 진보가 있었던 것이지요. 유약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인의 함량을 줄여야 했고, 그 방법을 찾아낸 도공들의 노력의 결과가 고려시대 '상감청자'인 것입니다. 우리나라 청자가 중국 청자를 제치고 세계 제일의 청자가 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그것이었지요. 창조적이고 동시에 과학적인 도공들의 힘.
투명유약을 만들 수 있어야 백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우리나라가 백자를 그토록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기술적 밑받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려적인 청자 탄생과 무신정권의 민족주의1258년에 마지막 지배자였던 최의가 죽을 때까지 최씨 정권은 68년간 집권했습니다. 잠시 권력을 잡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도자기가 필요했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답게 그들은 도자기가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름난 도자소는 재빨리 그들 차지가 되었습니다.
몽골족이 침략했을 때 강화도로 옮긴 무신정권이 그 조그만 섬에서 버텨낸 것은 남해안 지역에 있는 곡창지대와 도자소를 미리 손아귀에 넣어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뱃길로 들어오는 도자기와 곡식으로 부족한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