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청자상감발1073년(문종)에 제작된 청자 사발입니다. 아직 고려청자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도자기가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잔금도 많아 고급스럽게 여겨지지 않지만 적어도 유약을 다루는 기술은 이 때 완성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유약이 골고루 잘 스며들어 흘러내린 자국이 없고, 얇게 빚어져서 투박한 질그릇 냄새가 나던 순화4년명 항아리보다 세련되어 보입니다.
강진의 진흙가마 도공들이 왕실을 위해 구운 첫번째 도자기군 중의 하나로 여겨집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새로운 귀족의 탄생고려 제 16대 임금인 예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중요한 결심을 굳혔습니다. 고급청자를 만드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1108년에 자기를 굽는 자기소에 대한 개혁 작업을 시작합니다.
남해안에서 가장 좋은 청자를 만들어내는 가마에 아낌없이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최고급 청자 탄생 프로젝트를 위해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사당리 가마가 선택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들어질 청자는 최고중의 최고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한 것이었지요.
고려사회는 관리들이 이끌어가는 사회입니다만 그들이 나라 봉급으로 받아 사는 동안은 최고급 청자를 갖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요.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귀족뿐이었습니다. 봉급쟁이가 아니라 귀족. 고려시대 첫 귀족이 탄생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귀족은 '문벌귀족'이라고 합니다. 학문을 닦아 관직에 올라 그걸 바탕으로 귀족이 되었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지요. 귀족이란 대대로 신분과 땅을 물려받을 수 있는 사람들인데요, 과거제도와 전시과제도를 통해 호족들을 누르고 관료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고려 왕실이 어째서 귀족들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것일까요? 아니, 어째서 귀족들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그 해답은 유학에 있습니다.
삼국시대는 정복전쟁시대였고, 이후 남북국시대는 그런 고대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고려시대는 성종이후로 관리, 그것도 문관사회가 되었습니다. 문관들은 유학에 기반을 둔 통치이념을 가졌습니다. 유학은 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忠'과 '孝'는 기본적으로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따라서 효가 가정의 근본이듯이 충은 나라의 근본이었습니다. 임금들이 좋아할 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자가 처음 유학을 창설했을 때에 이 개념은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당시는 춘추시대, 모든 군주들은 백성을 재산취급을 하였지요. 마치 삽이나 도끼처럼 밭을 일구어 재산을 불려주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장에서 적을 물리치거나 영토를 넓혀주는 도구. 당연히 군주와 장수들은 백성들을 쉽게 죽였고, 재판 없이 처형했으며,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비인간적인 만행을 목격한 공자는 군주에게 '예치'를 가르쳤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듯이 백성을 대한다면 그런 나라는 강해질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힘의 논리만이 있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니라 '예(禮)'라고 불리는 새로운 관습법에 의해 재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진정한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예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그 골자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이 정식 국교로 선택되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자로 잰 듯한 법치를 표방하였던 진나라의 멸망은 백성을 힘이 아니라 이념으로 다스릴 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한나라 무제는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교이념'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동중서에 의해 왕도사상은 군주에게는 통치의 정당성을 주었고, 유학자들에게는 그런 통치에 대한 비판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 활동의 무한자유를 주었습니다.
따라서 유학자들은 돈이나 시간의 구애 없이 공부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 대가는 백성들의 충성. 고려왕실로서는 꽤나 매력적인 거래였습니다.
물론 임금이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설파하는 유학자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겠지만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귀족'이 되게 해주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고려 왕실은 이웃에 있는 송나라(북송)를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당나라가 전쟁으로 세계를 주름잡았다면 송나라는 애초부터 전쟁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중국이 역사상 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송나라는 그 어떤 나라보다 더 '지식'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결과 송나라는 과학, 기술, 문화, 상업이 발달해서 전 세계가 송나라 상인들로 들끓었습니다. 전 세계 귀족들은 송나라의 문물을 꿈꾸었습니다. 송나라가 칼과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기보다 지식인인 유학자 관리로 다스린 지식경영이 이루어낸 결과였습니다.
고려도 그런 지식강국을 꿈꾸었지요. 그러려면 안정되게 지식을 탐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학자를 키우는 일에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와 학문을 연구하고 발전시킬 사람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이 귀족대접을 받도록 하기 위해 제도까지 바꾸었습니다. 임금으로서는 골치 아픈 군인들인 무관보다 그런 문관들을 더 우대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그것이 고려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문종 임금은 5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에게는 귀족대접을 했습니다. 신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땅인 '공음전'을 주었으며 자식에게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벼슬을 할 수 있는 '음서'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전국의 젊은이들은 유학공부를 위해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국립학교인 국자감 외에 개경에 11개를 포함한 모두 12개의 사립학교인 12공도가 생겼는데 그중에서도 최충이 세운 9재학당은 과거합격률도 높고 학문수준도 높아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바탕은 나라를 이끌어가는 관리들에게 힘이 되어 문종 임금이 왕위에 있었던 1046년부터 고려시대의 황금기라고 할 만큼 진전이 있었습니다. 도자기는 세상을 손에 쥔 사람들의 상징물. 귀족들의 품위에 걸맞는 새로운 도자기가 필요해졌습니다. 그것이 최고급 청자제작 프로젝트를 위한 도자소설치의 숨은 이유였던 것이지요. 예종임금 시절, 문벌귀족은 세상 꼭대기에 오른 기분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비색청자, 송나라를 감동시키다1123년 중국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평소 도자기에도 조예가 깊어 고급 도자기를 보는 눈이 남달랐던 터라 고려의 고급 관리들이 가진 색다른 청자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며 전 세계 돈깨나 있는 부자들의 넋을 놓게 하며 주머니를 털어오던 오월자가 최고인 줄 알았던 그로서도 고려 도공이 만든 청자의 신비로운 빛에 푹 빠졌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나라 황제인 휘종에게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기행문인 '고려도경'을 만들어 바칩니다. 여기에서 그는 맑고 투명한 비취빛 청자인 '비색청자'를 본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로써 도자기 강국인 중국에 고려청자가 마침내 제 이름을 가지고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이때의 비색청자는 잔금이 없고 차분한 푸른빛이라 볼수록 고요하고 깊은 느낌이 납니다. '수중금'에서도 송나라 청자를 제치고 천하제일 명품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수중금은 중국에 사는 태평노인이 쓴 책으로 힘깨나 쓰고 돈깨나 있는 집 소장품 목록으로 이름 높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