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무늬토기통일신라시절, 신문왕의 통치와 더불어 토기기술은 절정에 이르렀고, 이때 만들어진 토기에는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동일한 무늬가 만들어지는데요,바로 도장무늬입니다. 두시대 문민통치의 절정기라는점에서 이 무늬의 유사성은 흥미를 끄는 대목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
당나라로 가는 유학생과 유학승들은 영암 구림리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영파로 가는 바닷길에 올랐습니다. 영파는 중국의 청자단지로 알려진 월주에서 가까운 항구도시입니다. 월주의 청자를 실은 배는 구림리에 짐을 내렸습니다.
청자를 바라보며 구림도기를 만들던 도공들은 무슨 생각에 빠져들었을까요? 토기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한탄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도전을 준비했을까요? 가까운 곳에서 청자를 만들기 위한 가마가 만들어진 것은 그때입니다.
중국청자, 흙의 마법이 풀리다청자를 최초로 만든 곳은 중국입니다. 고구려를 정복하려다 오히려 멸망한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는 운이 매우 좋았습니다. 통일을 위한 전쟁을 치르며 힘쓸 필요도 없이 당나라는 이미 수나라가 통일해 놓은 중국을 고스란히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수문제는 최고의 리더십으로 400년 혼란기에 허우적거리던 중국을 통일하여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걸린 시간은 단 20년. 균전제를 실시하고 세금을 균등하게 받았기 때문에 곳간의 쌀은 이후 수나라가 망한 뒤에도 20년이나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당나라는 수나라가 이루어 놓은 많은 일들을 바탕으로 발전하여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정복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제국이 300년이나 이어지며 세계 여러 곳을 누비다 보니 무역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동전을 만드는 구리가 모자랐습니다. 나라에서는 구리를 다른 데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당나라의 귀족들은 힘의 상징인 청동기를 꼭 가지고 싶었습니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구리 대신에 청동색을 내는 도자기를 만들어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런 까닭에 당나라 때 도자기가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더 발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랜 도자기 전통을 가진 곳은 중국 동남부 절강성의 도시인 월주입니다. 이곳에서는 도자기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흙과 유약혁명입니다.
토기를 만드는 흙은 진흙이지만 도자기를 만들려면 1300도가 넘는 온도에서 견딜 수 있는 흙이 필요합니다. 이런 흙만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데 중국 강서성에 있는 고령산에서 많이 나온다고 해서 '고령토'라고 부릅니다.
이 흙이 도자기가 된다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도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한 나라는 이 흙을 몰랐기 때문입니다(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들을 데려가 이 흙의 비밀을 알아내었고, 유럽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도자기를 만드는 흙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때 영국의 어느 귀족이 사형수에게 도자기를 만들어내면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 사형수가 일년간의 노력 끝에 동물의 뼈를 넣어 실험에 성공하였고, 그래서 영국의 도자기를 '본'차이나라고 한다고 합니다).
운이 좋게도 월주는 바로 근처에 고령토라는 흙이 나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고령토로 토기와는 비할 바 없는 도자기를 만들었습니다.
고령토는 석탄처럼 땅 속에 들어가서 캐내야 하는데 오랫동안 계속 퍼내다보니 바닥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월주는 옛 명성을 잃었고 품질이 좋지 못한 도자기를 만들며 위기에 빠졌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그때입니다.
월주 도자기를 되살리려는 도공의 피눈물 나는 연구 끝에 마침내 새로운 도자기를 만들 핵심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그것은 고령토의 주요한 성분이 되는 광물인 '장석'을 흙속에 섞는 기술을 찾아낸 것입니다. 고령토는 장석이 오랜 시간동안 잘게 부수어져서 고운 가루가 되면 만들어집니다. 흙의 마법이 마침내 풀린 것이지요.
월주의 도자기를 '월주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불 조절을 잘하고 유약 속에 들어가는 성분을 잘 이용해 신비로운 푸른 빛 도자기를 만들어내었습니다.
유약의 힘유약을 맨 처음 생각한 사람은 이집트 사람이라고 합니다. 유리로 만든 그릇이 잘 깨지자 토기 위에 유리를 발라 구워 타일을 만들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유리처럼 반짝이면서도 토기처럼 단단한 그릇이 만들어지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이 실험이 성공했을까요? 당연히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유약의 아주 중요한 단서를 남겼습니다. 반짝거리고 매끄럽게 하는 물질이 유리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죠. 바로 '규석'입니다. 유약에는 이 규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규석을 제아무리 곱게 갈아도 그릇의 겉에 발라 구우면 흘러내리고 뭉치고 심지어 들뜨기까지 합니다. 이래서야 도자기라고 부를 수 없겠지요.
오랫동안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누군가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음, 만일에 유약이 그릇과 같은 성분이라면 겉돌지 않을지도 몰라.'자기를 굽는 흙에는 '장석'이라는 돌가루가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 장석가루를 곱게 갈아 유약에 섞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장석은 높은 온도까지 견디면서 유리성분이 골고루 녹아 퍼지며 그릇에 달라붙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 유약을 '장석유약'이라고 부릅니다.
장석유약이 만들어지면서 도자기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장석유약은 투명해서 바탕에 그려진 그림이나 무늬를 그대로 드러나게 해주는 까닭에 '투명유약'이라고도 합니다. 이 투명한 유약이 도자기에 무늬와 그림을 그려 넣는 '예술품'이 되게 한 주인공입니다.
서양에서는 낮은 온도에서 광택이 나는 유약인 '납유'를 발라 도자기를 구웠습니다. 이것은 몸에 해로운 납성분 때문에 음식을 넣어둘 수 없었습니다. 식탁에 도자기를 올려놓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장석으로 만든 유약은 인체에 해롭지도 않습니다. 장석유약이 만들어짐으로써 도자기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귀족과 왕들의 식탁을 도자기로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청자 전쟁의 시작우리나라와 중국은 매우 신기하게도, 비슷한 왕조교체과정을 거치는데요, 당나라 말기와 남북국시대 말기 통일신라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두 나라는 왕실이 부패한 대신, 지방에선 호족이 힘을 키웠고, 그 호족들은 선종이라고 불리는 불교의 한 종파를 통해 자신들의 울분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선종은 '참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 수단으로 차를 마십니다. 이 차를 마시는 데는 토기를 쓸 수 없습니다. 토기는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미세한 구멍이 있어서 차나 음식을 넣어두면 그 찌꺼기가 스며듭니다. 그래서 그곳에 다시 차를 넣어도 음식을 넣어도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도자기는 구멍이 없습니다. '유약'을 발랐기 때문입니다.
처음 차가 전해진 것은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로 승려들의 수행을 위해서나 약초로 쓰였습니다. 그 뒤 흥덕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김대렴이 차씨를 가져다 심으면서부터 우리나라도 차를 즐겨 마시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차는 경주의 귀족은 물론이고 나라의 부자들이 꼭 가져야 하는 필수품이 되었으며 더불어 차를 마실 그릇도 앞 다퉈 중국에서 사들였습니다. 차와 찻사발 무역은 호족의 힘을 키워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김대렴이 차의 씨앗을 가지고 들어오던 해에 장보고가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우리나라 청자의 역사는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남해안에서 무역으로 힘을 키운 호족 가운데 청자가 가진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 그가 아닌 다른 누구였을까요?(이곳에 이만한 호족이 없었고, 그만한 호족이 아니면 청자산업은 진입비용이 많이 들고, 장보고와 함께 청자산업도 일시 폐업했었으니 그렇게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
토기와 달리 청자는 가마를 유지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청자는 만드는 데 50여 일이나 걸리고, 그나마도 질 좋은 청자는 열 개 중에서 하나가 되기 어렵습니다. 이렇다 보니 땔감을 지어오고, 흙을 퍼오고, 물을 길어오는 허드렛일을 하는 데서부터 도자기를 빚고 굽는 일까지 품값이 많이 들었습니다.
돈이 된다고 여겼던 것인지 아니면 청자값으로 너무 많은 국부가 유출되는 것이 안타까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장보고라고 여겨지는) 남해의 호족은 이런 비용을 기꺼이 내고서 청자를 만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영암에서 구림도기를 만들던 도공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호족의 후원 아래 청자를 만들기 위해 바다가 가깝고, 숲이 많아 땔나무도 풍부하고 질 좋은 흙이 많이 나오는 해남의 골짜기로 찾아들었습니다.
청자를 만들기 위한 꿈을 꾸는 사람들은 해남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해안을 따라 무역선이 닿는 곳에 있던 호족들은 역시 무역으로 부자가 된 호족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청자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후원에 힘입어 중부지방에도 가마가 만들어집니다.
한강을 가까이 두고 개경근처 벽란도에서부터 서산까지 만들어진 가마들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벽돌로 만들어진 가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