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그림.
얘기구름/박연
.. "세상에, 분꽃 좀 봐!" "예쁘죠? 여긴 제가 가꾸는 작은 꽃밭이에요. 그런데 분꽃은 항상 저녁에 피어요? 환한 낮에 피면 훨씬 예쁠 텐데." "그러게. 어릴 때 고향집에서 보고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아주 잊고 살았던 꽃이야. 네 할머니가 분꽃을 좋아하셔서 마당 한켠에는 꼭 분꽃을 심으셨단다." "헤헤, 할머니도 나처럼 꽃을 좋아하셨네요." "저녁 무렵 꽃잎이 열리면 은은한 분꽃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단다." "어, 향기가 나는 줄은 몰랐어요." .. (143쪽)폭식증이 있는 옆지기는 속이 허전할 때면 감자 두 알쯤 강판에 갈아 감자지짐이를 합니다. 감자지짐이를 할 때면 가끔 "또 감자지짐이인데 질리지 않아요?" 하고 물어 옵니다. "난 감자지짐이만 날마다 먹어도 좋아."
고등학교를 다니던 1991∼93년 세 해에 걸쳐, 제 도시락은 꼭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1991년에는 김밥. 1992년과 1993년은 볶음밥. 어머니는 아버지와 형과 저, 이렇게 세 사람 도시락을 날마다 싸야 했는데, 형과 저는 밤 열 시까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에 얽매여 지내는 중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도시락을 둘씩 싸야 했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도시락 다섯 통을 싸야 한 셈인데, 이렇게 도시락을 싸자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밥하고 반찬을 해도 빠듯합니다. 더구나 형이든 저이든 아버지이든 열한 시는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때에도 또 밥이나 다른 먹을거리를 차려 주셨으니, 날마다 고된 나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고되게 보내던 어느 날이었을 텐데, 어머니는 "도시락 반찬 하기 너무 힘들다." 하고 한 마디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반찬하는 고단함을 덜려면 어떡해야 할까' 하는 걱정과 근심이 이어졌습니다. "그럼 날마다 똑같은 밥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날마다 반찬을 새로 안 해도 되는 도시락이면서, 날마다 가장 빠르고 손쉽게 싸는 도시락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니, 김밥 싸기입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김밥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외려 김밥 싸기가 더 번거로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밥속 여러 날 치를 미리 만들어 놓고 둘둘 싸면 되니까 일손을 어느 만큼 줄일 수 있기는 했을 테지만, 더 손이 가야 하는 도시락이었겠지요. 김치와 밥만 싸면 되는 도시락이라면 아무 어려움이 없을 텐데, 제가 입이 짧아 김치를 제대로 못 먹었기 때문에, 어머니로서는 걱정이 크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반찬을 생각하기보다 김밥을 쌀 때가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 해를 김밥 도시락으로만 들고 다니다가, 이듬해와 다음해에는 볶음밥으로 바꿉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한 해 반 대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에 갔고, 군대에서 '김치 못 먹던 버릇'을 고쳤습니다. 군대 김치는 집에서 먹듯 매운김치가 아니었습니다. 이때 어렴풋이 느꼈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고추가루가 범벅이 된 김치는 거의 삭여내지 못했습니다. 고추가루 기운을 물에 헹구어 내면 어느 만큼 삭여냈고, 흰김치는 때때로 먹곤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여기까지 생각하지 못하셨겠지만, 모든 사람이 '빨간김치'를 잘 먹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고추장에는 설탕을 타니, 단맛 때문에라도 먹는다지만, 맵기만 한 고추나 고추가루가 몸에 안 받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군대에서 휴가 나올 때 양구 읍내 밥집에서 먹던 나물 반찬 때문에, 제 몸에 맞는 먹을거리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저한테는 절인 김치가 아닌 '날것대로 먹는 푸성귀'나 '살짝 데친 나물'이 가장 몸에 잘 받는 먹을거리였습니다. 저는 찬국수(냉면)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콩국수 또한 조금만 먹는데, 차고 시큼한 국물은 제 몸에 안 받습니다. 뜨겁고 부드러운 국물만 제 몸에 받습니다. 김치찌개는 못 먹고 된장찌개나 청국장이나 우거지국은 잘 받습니다. 어릴 때부터 먹을거리를 놓고 하도 탈이 잦았기에, 탈이 나면서 조금씩 제 몸을 알아갔는데, 누군가 찬국수를 사 준다면서 억지로 시켜 제 앞에 차려 놓아 주면, 애써 시켜 주었기 때문에 안 먹을 수도 없어 몇 젓가락이라도 뜨는데, 이렇게 몇 젓가락이라도 뜨면 으레 한 주 내내 배앓이를 하며 밥을 못 먹습니다.
옆지기는 저하고 거꾸로입니다. 옆지기는 매운김치도 잘 먹고 찬국수는 아주 좋아합니다. 국물 있는 국과 쌀밥이 잘 안 받습니다. 이런 엄마 아빠한테서 새 목숨을 받은 아이는 나중에 어떤 몸일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엄마 밥상대로 차려 주어야 할는지, 아빠 밥상대로 차려 주어야 할는지, 아이는 아이대로 다른 밥상을 차려야 할는지 차근차근 지켜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