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최종규
연극을 하던 사람 추송웅이 있습니다. 1941년에 태어나 1985년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당신은, 고작 마흔다섯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1977년 서른일곱 살이 될 때 무대에 선보인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보여주기까지는 가난에 허덕이는 하루하루였습니다.
1963년, 스물셋에 연극밭에 몸을 담근 지 열다섯 해 만에 큰빛을 본 셈인데, 큰빛을 본 이듬해에 드디어 당신 이름으로 살림집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태 뒤인 1980년에는 연극 소극장 '테아트르 추'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달콤한 하루하루를 얼마 보내지 못한 1985년 12월 29일 새벽, 배앓이를 하다가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바로 이해 1985년 5월에는 '모노드라마 1천 회 공연'을 이루어냈다고 하는데, 1천 회에서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잠들은 셈이라고 할까요.
.. 아버지는 하필이면 내가 다니는 국민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셨다. 위로 형님 세 분, 누님 두 분, 모두가 수재라 할 만큼 공부를 잘하셨다. 그런데 막내녀석 하나가 생긴 것도 묘하게 생긴데다 둔재요 보통 골치가 아니었다 … 담임 선생님과 아버지가 잠시 말씀을 주고받는데 아버지가 오늘 산수 공부를 직접 가르칠 터이니 양해해 달라는 내용이 아닌가? 나는 순간 뻥하고 망치로 얻어맞은 듯 아찔했다. 아버지께서는 무슨 방법, 어떠한 챙피를 주더라도 막내둥이 산수 실력을 올리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하신 모양이셨다 … "하나에 둘을 더하고 또 다섯을 더하고 다시 여섯을 더하면 모두 얼마냐? 아는 사람 손 들엇!" 딱 한 녀석만 빼놓고는 전부 손을 들었다. 물론 그 녀석은 바로 교장 선생님의 막내둥이 나였다.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셨다. 창피하시기도 하셨으리라. "추송웅 이리 나온나." … 순간 뭔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둔탁한 아픔이 왔다. 얼마 후 내가 눈을 뜬 곳은 교단 위가 아니라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낯선 방이었다. 참다 참다 못한 아버지께서 불같이 솟아오르는 화를 못 참으시고, 지지리도 못생긴 자식을 주판으로 후려갈겨 버리신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혼미하고 후들후들 떨리던 판이라, 아버지에게 맞고는 나는 그만 기절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이 소동을 전해 들은 어머니가 빨래를 하시다 말고 방망이를 드신 채 학교와 병원으로 정신없이 뛰시면서 "깡패 교장이 자식 죽인다"고 고함을 치셨으니, 그 웃지 못할 촌극은 두고두고 학교의 얘깃거리로써 남게 되었다. 그날 밤, 퇴원을 하기 직전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나서 슬쩍 바라보니 아버지가 분명하셨다. 나는 못 본 척 눈을 감고 자는 듯 누워 있었다.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신 아버님은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그냥 나를 내려다보신 채 상념에 잠기신 모양이었다. 갑자기 뜨거운 액체방울이 내 오른뺨 위로 떨어졌다. '흥,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우는가베.' 목메인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웅아, 이제 산수 공부 안 해도 좋다. 아프지만 말아라, 잉." .. (23∼29쪽)저는 연극을 잘 모릅니다. 연극을 본 일도 몇 번 안 됩니다. 이제까지 통틀어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되지 싶습니다. 연극을 딱히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화를 딱히 싫어하지 않으나 따로 좋아하지 않으며, 여행을 딱히 싫어하지 않으나 따로 좋아하지 않는 가운데, 춤을 딱히 싫어하지 않으나 따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연극을 제대로 만날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연극을 잘 모르며, 그리 못 즐기지 않느냐 싶습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인천에는 연극 모임이 제법 있고, 연극을 내거는 작은극장도 있었습니다만, 연극을 슬슬 볼 만한 나이에는 학교에서 시험공부에 붙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시험공부에 붙잡혀야 하는 학교에서 풀려난 다음에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고향을 떠난 뒤에는 책읽기로 삶을 익히고 세상을 배우느라 다른 곳에 눈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책 하나에만 푹 빠진 채, 책 아닌 이야기는 '나와 다른 곳에서 나와 달리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로만 여겼습니다. 다만, 나와 다르고 나와 동떨어져 있으나, 저마다 제자리에서 즐겁고 힘차고 바르게 살아가면 넉넉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나대로 책밭에서 힘내고 땀흘리면 되고, 다른 분들은 다른 분들대로 그분들 텃밭에서 힘내고 땀흘리면 될 테니까요.
.. 나는 눈이 사팔뜨기였던 것이다. 나는 산수 시간만 되면 안절부절했다. 구구셈을 외우기 시작하면 더더구나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1단에서 2단으로 가고 2단에서 3단 4단으로, 4단이 시작되어 한 자리씩 오르면 피가 말랐다. 선생님의 주의에도 아랑곳없이 4×8이 32라고 신명나게 제창을 했다 .. (39쪽)모든 학문과 생각밭과 일놀이는 '말'을 바탕으로 합니다. 연극이나 영화나 여행이나 춤, 또 사진이나 그림이나 만화는 '책'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말 없이 아무런 세상이 없고, 책 없이 아무런 문화나 예술이 없다 할 만합니다. 이런 느낌을 일찍부터 받았기에 저 스스로 말에 온마음을 바치고 책에 온몸을 기울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세상과 문화예술을 이루는 바탕인 말이요 책이지만, 바탕만으로는 썩 재미있기 어렵습니다. 주춧돌만 서서는 집을 이룰 수 없고, 기둥만 있다 하여 집은 아니니까요.
지붕도 얹고 기와도 얹으며, 온돌을 깔고 마루를 대며 창문을 달고 대문을 붙여야 집입니다. 벽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못을 박아 온갖 살림살이를 걸어 놓거나 무청이나 배추잎을 말릴 수 있습니다. 집 앞에 조그맣게 꽃밭을 일구거나 남새밭을 가꿀 수 있어요. 밑바탕이 없이는 어느 하나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밑바탕만 소담스레 여길 까닭이란 없습니다. 밑바탕만으로는 우리 삶을 이룰 수 없습니다.
말을 생각하지 않는 학문이란 뿌리가 없이 헛도는 학문이지만, 말만 생각하는 학문이 되면 따분하면서 지루합니다. 책을 생각하지 않는 연극영화란 줏대가 없이 떠도는 문화예술이지만, 책만 생각하는 연극영화가 되면 메마르고 팍팍해집니다.
그나마,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빠알간 피이터 추송웅>을 만났고, 2004년에 나온 <추송웅, 배우의 말과 몸짓>(안치운 씀) 같은 책을 찾아 읽으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연극을 헤아립니다. 책 몇 가지를 읽는다 하여 연극을 안다 할 수 없고, 또 스스로 보지 못한 추송웅 연극 이야기를 추송웅 님 책을 읽는다 하여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연극도 모르고 연극인 또한 모른다 하여도, 한 사람이 걷는 길은 알아보게 됩니다. 연극에 온몸을 바친 한 사람 길을 느껴 보게 되며, 연극에서 온삶을 불사른 한 사람 매무새를 만나게 됩니다.
.. 겨우겨우 나를 잊은 채 남의 인생 대역 노릇 하다 보면 하루 해가 간다. 저녁때가 되어 백반 정식이라도 먹고 싶은데, 혼자 가면 차리기 구찮다고 백반 정식은 주지도 않는다. 먹고 싶지도 않은 곰탕이나 육계장을 주인이 주는 대로 결국 먹게 되는데, 그것도 오래 먹으면 자리가 좁아 손님 못 받는다고 또 혼이 난다. 습관처럼 대포 몇 잔을 들이키고 귀가길에 들어서면 그때사 피로와 함께 소변이 마렵다. 그러나 공중 변소는 없고 빌딩 변소들은 잠겨 있어 230원 차를 먹고 다방에 안 들리면 소변 볼 수도 없다. 230원이 아까워서 골목 빌딩 벽에다 숨어서 소변을 본다. "여보, 점잖은 분이 어디다 소변을 봐요." 뒤를 급히 돌아보니 방범대원이다. "죄송합니다. 개로 봐 주십시오. 이렇게 한 발 들고 쌀 테니 말이요……." 후유―. 살기도 힘들다. 하루가 혼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혼나는 것으로 끝나는구나 .. (86∼87쪽)가난한 주제에 책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돈없는 주제에 책으로 연극을 만나고 영화를 만나고 여행을 만나며 춤을 만난다고 할까요. 제가 태어나기 앞서 사진을 찍어 온 분들이 있기 때문에, 제가 보지 못하던 지난날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바로 그 지난날을 살아온 분들하고도 '예전 이곳이 어떠했음'을 이야기로 나누며 머리속으로 가만히 떠올려 보곤 합니다.
추송웅 님이 연극배우로 한창 꽃을 피우던 때에 제가 함께 살고 있었다면 저 또한 추송웅 님 연극을 보면서 웃고 울고 이야기꽃을 피웠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추송웅 님이 연극배우로 한창 꽃을 피우고 있던 줄을 몰랐을 뿐더러 연극밭에 눈길을 둔 적조차 없었기에, 외려 차분하게 '한 사람 추송웅'을 책으로 사귀면서 돌아봅니다. 연극하는 추송웅 님은 이렇게 이 길을 갔다면,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아이를 키우고 동네도서관을 하고 책을 만들고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최종규라는 한 사람은 어떤 길을 어찌어찌 가는지 헤아립니다.
사팔뜨기로 태어나 온통 주눅든 채 어린 나날과 젊은 나날을 보냈고, 열여덟 나이에 드디어 '사팔뜨기 고치는 수술'을 받으면서 "이제부터 제발 학교 잘 다니고, 부모님 속 안 썩히고 좋은 일은 다 할 테니, 제발 4×8이 32 소리만 안 듣게 해 주십시오.(41쪽)" 하고 비손을 올리던 추송웅 님 삶자락을 곱씹습니다. 저한테는 어떤 아픔이 있었을까 되씹고, 이 아픔이 제 삶을 어떻게 가꾸어 주고 있는지 생각합니다. 죽고 없는 한 사람이 걸은 길을 엿보면서, 살아 있는 한 사람이 걸을 길은 어떻게 다스릴까를 생각합니다.
(2) 연극쟁이를 보며 사진쟁이를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