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판 염전의 첫소금을 축하하는 작목반 동료와 가족들
김준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는 장판을 거둬낸 염전을 토판으로 바꾸고 소금을 앉혔다. 목포에 계시는 그의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셨다. 23년만이다. 작은 염전이지만 박씨에게는 아버지와 형의 땀이 배여 있는 곳이다. 두 형은 이 염전을 가꾸다 사고로 돌아가셨다.
어렸을 때부터 두 되짜리 주전자에 술잔과 안주를 올린 후 뚜껑을 덮어 염전을 오갔다. 박씨에게는 염전이 놀이터였다. 막내를 끔찍하게 아꼈던 아버지는 막내만은 염전 일을 시키지 않았다. 박씨가 염전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장성한 아들의 따귀를 때렸다.
염전에서 일하는 것이 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염전에 묻은 두 자식 때문이었다. 막내만은 육지에서 반듯하게 살길 원했다. 박씨도 결혼해서 목포로 나갈 때는 아버지는 물론 섬 어른신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을 쪼아 만든 절구통을 싣고 나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심산이었다.
염전도 남에게 임대를 주었다. 트럭에 몸을 의지하고 객지를 떠돌며 야채장사와 과일장사를 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고향 염전에 머물렀다. 아버지가 손수 마련한 염전이었다. 두 형의 뼈가 묻혀 있는 염전이었다.
아버지 몰래 들어와 염전을 둘러보고 과일나무도 심었다. 꼭 다시 돌아와 보란 듯이 염전으로 성공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내를 설득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10년을 설득했다. '가세, 가세, 가서 사세.' 아내의 마음도 움직였다.
그런데 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완곡하기로 소문난 아버지였다. 결혼한 아들이 늦게 일어난다고 구들장을 쇠스랑으로 파버린 양반이었다. 형의 네 조카와 박씨의 자식까지 가르치기 위해서 염전을 택했다. 아버지도 현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염전은 그에게 희망의 씨앗이자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