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 앞 갯벌은 양식어장으로 장좌리 주민들의 생활터전이다(감태를 뜬는 어민)
김준
천년 '기억', '역사'가 되다매서운 바람이 굴 밭을 스치고 장섬와 매단(장좌리 해송숲) 사이 갯골을 지나 신지대교로 달아났다. 몇 차례 바람이 불고 난 후 길이 열렸다. 길이 180m 폭 100m쯤 될까. 단숨에 갯벌을 지나 청해진시대 장섬에 들어섰다.
이곳에 군사 일만이 머물렀다. 장보고는 유년기 ‘궁복’, ‘궁파’로 불렸다. 활을 잘 쏘아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젊은 시절 당나라 서주 무령군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워 30세(819년)에 군사 1천명을 지휘하는 군중소장이 되었다. 당시 중국 동해안에는 재당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며 선박제조 및 수리, 새운업, 목탄제조, 칼제조, 소금 등을 생산하며 살고 있었다.
이들 재당 신라인은 중국 동해안은 물론 페르시아와 일본까지 잇는 무역상들이었다. 이 무렵 당의 지방통제력이 약회된 틈에 해적들이 기승을 부렸다. 특히 재당 신라인을 잡아 노비로 팔아 외교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장보고는 귀국하여 신라 흥덕왕에게 해적을 막기 위해 청해진 설치를 건의하였다.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흥덕왕은 거부로 성장한 장보고에게 서남해 지역 관활권을 승인해었다. 게다가 군사 1만과 대사라는 직함을 내려 내주었다. 그래서 장보고를 일컬어 ‘청해진대사’라 한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파격이었다.
청해진 터는 완도 장좌리 장도를 중심으로 대야리와 죽청리 일대로 추정하고 있다. 몇 차례 발굴로 장섬에서 토성과 우물, 자기편과 제기 등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섬 주변에서 열을 지어 박혀 있는 직경 30㎝ 안팎의 목책이 확인되어 청해진 본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밖에 당시 여러 자료를 통해 완도는 물론 강진, 영암, 해남 등 서남해 일대는 ‘청해진 관할 섬’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한 장보고는 이후 신라 왕위 계승에 휘말려 귀족 김양의 사주를 받은 염장에 의해 841년 암살당한다. 동아시아 해상권을 장악했던 해신 장보고는 이후 고려와 조선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정치권력에 의해 ‘역신’으로 낙인찍히고 오직 민초들의 기억에 의존해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