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 노동자들을 다룬 소설 <철>.
문학과지성사
젊은 작가 김숨의 문체는 무뚝뚝하면서 거칠다. 동물성의 문장 하나하나가 느슨하게 서로 이어주며 나가는 문단과 플롯은 영락없이 무표정한 어느 한 사내의 표정과 닮았다. 그를 아는가. 나는 그를 알고 있다. 지독한 가난에 울부짖다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공장에 뛰어들어 노동자가 된 사내. 그는 40년 가까이 묵묵히 한 곳에서 기계를 만지며 숭고한 밥벌이 현장, 그 중심에 올곧게 서 있다. 나의 아버지 아니면 당신의. 작가의 글은 어느 누구를 쉽게 비난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관찰하면서 서투르고 투박한 진정성을 슬며시 꺼내어 보여준다. 관찰과 기록에 몰두하면서도 이따금씩 녹이 슨 그들의 어깨를 주무르는 그 따뜻한 손길마냥.
장편소설 <철>은 작가의 말처럼 거대한 철선의 완성을 위해 노동에 힘쓰는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로지 철선의 완성을 위해 도구처럼 쓰이다가, 마모되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노동자들에 대해.'(277쪽, 작가의 말) 배경은 조선소가 들어서 발전의 희망을 품게 된 어느 마을. '위대한 조선소 노동자'들의 행렬로 시작하는 이 글은 거대한 철선의 완성을 꿈꾸며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그들은 번영과 더 나은 밥벌이를 꿈꾸지만 침묵덩어리 철판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철은 녹이 슬게 마련이고, 때문에 다 소모된 그것들은 온 동네를 불그스름한 빛깔로 물들인다.
마찬가지로 조선소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병든, 혹은 낡은(녹이 슨) 노동자들이 그 어떤 해명도 듣지 못한 채 해고 통보를 받는다. 유통기한이 지난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유령 같은 거리를 배회하다 하천에 빠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사람들은 녹과 죽음에 서서히 무감각해진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적인 발상이 누구에게나 있듯, 그들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지 않거나 좀 더 늦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불규칙한 해고는 어느 누구 하나 거르지 않고 고르게 찾아온다. 우리의 아비와 닮은 숱한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반대 시위나 투쟁의 주모자를 고발하는 등 이간질에 한몫하며 가까스로 생존하던 김태식이란 인물도 결국 조선소에서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한다.
철의 시대가 지고, 강(鋼)의 시대가 떠오르면서 세상은 그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다. 철선의 완성은 까마득하기만 하고 숱한 동료를 배신하며 악착같이 버티던 노동자들도 결국 신기루와 같은 욕망의 끝에서 순식간에 미끄러진다. 나락은 끝도 없이 밑으로 향하고,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과 가족의 밥벌이를 위해 묵묵히 살아간다. 철선을 꿈꾸며, 터무니없게도.
짧고 건조한 문체를 지녔다는 점에서 조세희의 <난쏘공>이 연상되는 이 소설에는 뚜렷한 시간대나 공간이 드러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기도 하고, 알 것도 같지만 소설 안에서는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는 곧 그들이 사는 '그곳'만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우리 주변 모든 이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작가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점이다.
최근 암울한 현실과 더불어 문단에서는 노동소설의 부활을 요청하고 있다. 거대 조직과 이윤을 위해 기꺼이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금단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는 적절한 제안을 넘어서는 대단히 애절한 바람이라 볼 수도 있겠다. 지금 이곳에서 울고 있는 그들에 대해 말해 달라는, 그 시공간에 대해 읊조려 달라는 부탁은 아닐까.
그런 흐름에 부합하는 김숨의 <철>은 노동소설의 골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른 낯선 특징을 갖고 있다. 기계화된 노동자, 노동 속에서 그저 톱니바퀴나 나사 신세로 전락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어디 어제 오늘 일인가. 작가는 성긴 문장, 무뚝뚝한 진정성, 남미소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환상적 인물과 사건 그리고 묘사를 통해 독특한 위치에 이 작품을 슬며시 얹어놓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