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에 낸 수필책에 실려 있던 장영희 교수님 살아 있을 적 모습입니다.
한영희
세상 떠난 한 사람이 죽은 일을 앞두고 여러 매체에서 '궂긴 소식'을 실어 줍니다. 모두들 '장애인 장영희'한테만 눈길을 맞추고, '한 사람 장영희'한테는 눈길을 맞추지 않습니다. 아니, 눈길을 맞출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눈길은 장영희님한테만 맞춰지는 매무새가 아닙니다. 여태까지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았고, 앞으로도 그리 달라질 듯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오로지 돈만 바라보도록 맞춰져 있으며, 사회로 나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오로지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높은 이름을 날리며 더 큰 힘을 누리는 사람'이 되도록 '네 동무를 미워하라, 밟고 타 올라서 너 혼자 1등이 되어라' 하고 내모는 제도권입시교육이기 때문입니다.
..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슬픔과 기다림의 갈증을 견뎌내야 하는 아픈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필연적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시인으로 새로 태어나고, 시의 세계에서 삶의 궁극적인 비상구를 찾게 했다 … 무정한 모정에 대한 비난이 혹독하지만, 아마도 두고 가는 자식들도 결국은 자신처럼 '안'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절망감이 죽기 싫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를 밀치고 세 살짜리 어린아이까지 안고 뛰어내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끼리 모여 동그랗게 금 그어 놓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밀쳐내며 사는 이 세상에 자식들을 두고 가기가 너무나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작품 중에서 유독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 말이 주는 너그러움이, 따뜻함이,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낯선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73, 108쪽)<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으면서 새삼 놀랐습니다만, 장영희님 글을 실었다는 〈조선일보〉는 장영희님 글을 받으며 어떤 느낌 어떤 생각이었을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곰곰이 살피면, 신문 〈조선일보〉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끼리 모여 동그랗게 금 그어 놓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밀쳐내며 사는 이 세상"이 더욱 단단해지도록 하는 데로 모아져 있지 않습니까. 사랑보다 돈을, 믿음보다 이름을, 나눔보다 힘(권력)을 높이 추켜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장영희님이 그런 신문에 그런 글을 실은 모습은 엇박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다시금 곰곰이 헤아리면 그리 엇박자는 아니었구나 싶습니다. 장애인이고 비장애인이고 똑같이 아름다운 목숨 하나요 살가운 사람 하나라 한다면, 돈바라기 사람이든 사랑바라기 사람이든 똑같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일찍 철이 들었든 나이먹어도 철이 안 들든 똑같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뜨거운 가슴은 누구한테나 깃들어 있습니다. 제힘으로 알아채지 못하는 너른 넋은 누구한테나 잠들어 있습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장영희 님은 '몇몇 깨인 사람한테만 사랑을 말하려는 목소리'이기보다, '깨인 사람이고 깨이지 않은 사람이고를 가리지 않고 누구한테나 사랑을 말하려는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책을 거듭 읽으면서 새삼 느낍니다. 그리고 이 목소리를 '깨인 사람이고 깨이지 않은 사람'이고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 그때부터 마아너는 딱딱하고 차가운 금화 대신에 딸 에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키우며 자기를 버렸던 세상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친절을 베풀기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도 마아너를 따뜻하게 대한다. 그는 에피를 통해 난생처음으로 사랑을 준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끼고, 이 세상에 선이 존재함을 새롭게 배운다 …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지만, 이 소설에서 강조되는 점은 돈에 집착했을 때 고립되고 의미 없는 삶을 살던 마아너가 그 돈이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실된 인간관계를 발견한다는 아이러니이다 … 거울에는 자기만 보인다. 금ㆍ은으로 사방에 벽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마치 거울 속 사람들처럼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만 돌보며 감옥인 줄 모르는 채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 (135∼136쪽)ㅈㅈㄷ이라는 신문들만 골프 이야기입네 외국여행 이야기입네 비싼 자동차 이야기입네 떠들지 않습니다. ㅎㄱ이라는 신문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떠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서민'은 옛날 '백성'과 달라, 큰차 몰고 나라밖으로 골프를 즐기러 떠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을는지 모릅니다만, 주식투자이든 펀드투자이든 돈 놓고 돈 먹는 일거리는 오늘날 '부자'뿐 아니라 오늘날 '서민'도 함께 즐기는 일인지 모릅니다만, 정규직 노동자만 갖은 부귀영화를 누려야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라 하여 타워팰리스를 꿈꾸지 말란 법 없습니다만, 딱히 더 나은 신문이나 방송이란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어느 신문도 '한 달 벌이 50만 원으로 살림을 꾸리는 사람 눈높이'에서 찾아 읽을 만한 이야기거리를 기사로 다루지 못하고 있거든요. '쉬는 날 없이 한 달 빽빽하게 열 시간 남짓 일하여도 백만 원 받기 어려운 형편'인 가운데 지친 몸으로 펼쳐들어 읽을 만한 이야기거리를 다루는 신문이란 글쎄, 하나도 없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다루는 기사뿐만이 아닙니다. 기사로 쓰는 말과 글도 그렇습니다. '여느 노동자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읽을 만한 높낮이로 글을 다스릴 줄 아는' 지식인이나 기자가 이 나라에 몇이나 있는지요. 다루는 기사도 기사이지만, 기사에 담는 말과 글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가를 헤아리면서 늘 힘쓰는 분들은 몇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는지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인지, 한국사람 아닌 이들이 읊는 섞임말인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 언제부터인가 눈만 뜨면 떠드는 '세계화'는 실상 자존심도 오기도 없는 '강국화'일 뿐, 힘없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짐승, 버러지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것이 진정 '세계화'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부모 형제들도 바로 지금 우리가 인간 취급도 안 하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때 간호사로 광부로 낯선 나라에 가서 고된 노동을 하고 고향에 부친 달러는 겨우 우리가 인간과 짐승도 구별 못하는 '부자'가 되는 데 일조했을 뿐인가 보다 … 시인 박노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노래했다. 맞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때는 사람만이 절망이기도 하다 .. (277, 279쪽)장영희님이 서양문학이 아닌 한국문학을 했다고 하여도, 또 한국문학으로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펼쳐냈다고 하여도, 당신이 부대끼고 곰삭이며 차근차근 나누려 했던 이야기는 매한가지였으리라 느낍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하고 노래할 수 없는 이 땅에서 끝없이 걸려 넘어져야만 하는 삶을 꾸리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고 느끼고 담아내는 목소리는 한결같았으리라 느낍니다. 우리는 '달러(돈)' 아닌 사랑을 보아야 하고, '달러'에 매인 채 살아가는 동안 우리 스스로한테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한테도 '달러'만 보여주고 가르치고 물려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목소리를 풀어냈으리라 봅니다. '사람만이 절망이다'고 느끼는 가운데에도, 이 절망을 딛고 설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한편, 절망을 딛고 선다기보다 절망은 또 절망대로 고운 벗님이니 고마이 껴안으면서 살아가는 기쁨을 나누려는 목소리를 펼쳐냈으리라 봅니다.
.. 어른들의 닫힌 마음으로 아이들의 열린 마음까지 꽁꽁 걸어 잠그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결국 어른들의 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절망 끝에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을 지켜 주는 것은 피비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아이러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 가까이에서 공부할 수 없으니 학교에 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을 어린 학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런 아이들이 자라면 이 세상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누구나 조금씩의 모자람, 불편함을 갖고 있어서 서로 양보하고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곳이고, 그것만이 이 세상을 지키는 진정한 파수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을까 .. (184∼185쪽)장영희님이 아직 유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던 때 방학을 맞이해 한국땅으로 돌아와 동생하고 '명품을 많이 판다는 패션가를 지날 일'이 있었고, 이때 동생이 옷 구경을 하러 들어간 가게에서 당신은 못 들어가고(계단 턱이 너무 높아) 문밖에 서서 기다리니, 가게 임자가 나와서 당신을 거지로 여기고는 어서 꺼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합니다. 아마, 장영희 님으로서는 이런 일을 겪으며 또다시 '걸려 넘어지기'를 하는 가운데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라는 영국 시인 문학과 삶을 찬찬히 읽어낼 수 있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저는 목발까지 짚지는 않으나 헐렁한 차림새에 고무신을 끌고 자전거를 슬슬 몹니다. 늘 큰 가방에 책을 가득 채우고 다니니 언제나 온몸에서는 땀내가 풍기기까지 합니다. 몇 해 앞서 ㄱ이라는 국립기관에서 한 해 동안 '우리 말 이야기 강사'로 일한 적 있는데, 그때 ㄱ이라는 국립기관 건물 지킴이들은 '잡상인 출입금지'를 내세워 눈을 부라리고 막말을 하며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제가 그 국립기관에서 강사로 일하는 사람인 줄 알고는 갑자기 거수경례를 하더니 높임말로 바뀌더군요. '여느' 강사처럼 까만 양복을 빼입고, 까만 차를 몰며 다녔다면 어느 누구도 저를 가리켜 '잡상인'이라든지 '노숙자'라든지 '미친놈'이라며 삿대질을 안 했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일을 늘 겪는 동안, 제가 이런 제 삶을 좋아하면서 즐기지 않았다면 세상 푸대접이나 따돌림이란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다만, 이런 일을 겪고 저런 일을 치르면서도 제 어리숙한 마음밭은 좀처럼 자라나지 못하지만.
(3) 문학으로 꾸려 온 삶몸이 아픈 가운데에도 글쓰기와 문학즐기기를 멈추지 않은 장영희 님은, 몸뚱이는 흙으로 돌아가면서 책 하나를 더 우리한테 남깁니다. 며칠 앞서 나온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마지막 남긴 선물로, 이제까지는 '몸이 살아온 기적'이라면, 앞으로는 '마음이 살아갈 기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 '시와 사랑의 강'. 아인슈타인이 시인인지 물리학자인지 모를 정도의 문학적 표현이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 아침에 눈만 뜨면 세상이 달라지고 아인슈타인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 세 가지 이상, '친절과 아름다움과 진리'도 점차 힘을 잃어 간다. 그래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로봇같이 움직이고, 시와 사랑의 강은 자꾸 말라만 간다 … 나는 새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별로 '특별'하지 않은 가장 보통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무슨 특별하게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대박이 터지거나, 대단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누구나 노력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기괴한 일이 없고, 별로 특별할 것도, 잘난 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이 서로 함께 조금씩 부족함을 채워 주며 사는 세상 .. (89,141쪽)생각해 보면, 살아온 기적이든 살아갈 기적이든 조금도 남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바람을 마시고 햇볕을 쬘 수 있으면 살아 있음이요 기적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숨이 멎고 더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면 죽어 감이요 또한 기적입니다. 내 몸은 다른 목숨붙이를 받아들이며 숨을 이었고, 내 몸이 숨을 멎으면 흙으로 가면서 다른 목숨붙이가 살아갈 거름이 됩니다. 내가 사는 동안 나한테 스며든 목숨들이 바친 몸뚱이가 기적과 같으며, 내가 죽은 다음 내 몸뚱이가 새로운 밥이 되어 다른 목숨한테 옮아 감이 또 기적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몸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새 밥을 먹으며 기운을 얻어 몸이 움직이는 우리들인 가운데, 새 마음을 먹으며 새 넋을 일깨우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 하지만 이 세상을, 이 나라를, 아니 가족조차 변화시키려는 야심이 없이 아버지는 늘 순수하게 '사람을 좋아하고 책을 즐기는' 학자의 외길 인생을 기쁘게 살다 가셨다 …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 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난 확신한다 … '살아 있음'의 축복을 생각하면 한없이 착해지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 모든 것을 포용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가슴 벅차다. 그러고 보니 내 병은 더욱더 선한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경고인지도 모른다 .. (104, 316∼317쪽)틀림없이 장영희님은 수많은 마음자리를 고이 얻으면서 마음삶을 이었습니다. 당신 몸뚱이 때문에 '걸려 넘어진' 온갖 일이 있었다는데, 당신 마음 때문에 '걸려 넘어진' 일도 숱하게 많았으리라 느낍니다. 그렇지만 몸 때문에 걸려 넘어진 온갖 일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몸삶을 이었듯, 마음 때문에 걸려 넘어진 숱한 일을 스스럼없이 맞아들이면서 마음삶을 이었습니다.
이 마음삶은 언제나 수필이라는 옷을 입고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되었으며, 한 벌 두 벌 선보인 옷을 모두어 <내 생애 단 한 번>이라든지 <축복>이라든지 <생일>이라든지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든지 하는 이름으로 고이 묶어내어 나누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세상을 떠난 장영희님 목소리는 더 들을 수 없고, 앞으로 또다른 장영희님 선물이 우리 앞에 선보이지 않겠지만, 숱한 마음밥이 장영희 님한테 스며들어 새로운 이야기로 피어났듯, 우리는 우리대로 장영희님이 나누어 준 마음밥을 달게 받아먹으며 우리 깜냥껏 새로운 마음밥을 일구어 우리 이웃한테 나누어 줄 삶을 이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신 누운 자리가 고즈넉하고 따뜻하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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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샘터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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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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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급 장애인' 아닌 '문학사랑이' 장영희님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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